발매일 1996.6.22
개발사 id Software
디자이너 American McGee, John Romero, Sandy Petersen, Tim Willits
프로그래머 John Carmack, John Cash, Michael Abrash
변화한 시스템에 맞추어 Quake는 먼저 모든 레벨들을 복층으로 설계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깨나가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층들을 수직적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층들에 적들을 배치하고, 층과 층 사이는 전부 창문 등을 통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져 있도록 했다. 즉 평면적으로 배치된 각각의 구역들이 슈팅을 통해 서로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한 Doom의 철학을, 수직적으로 쌓아 올려 복층으로 구현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단 평면의 디자인을 수직적으로 활용 및 확장한 것에 가깝다. 각각의 층들은 동일한 X와 Y 좌표 상에 있고 또 창문이나 텅 빈 공간이 층과 층을 분리해놓고 있어 슈팅을 통해선 서로와 상호작용 가능하나, Z 좌표 상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도구가 없는 Quake의 특성 상 플레이어의 이동은 철저히 위에서 아래로만 이루어질 수 있고 그 역은 불가하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어떤 층에 있든 간에 다른 층의 적들로부터 공격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반드시 프리 룩 조준을 적확히 활용해야만 한다. 또 Quake는 커버 뒤와 뒤를 오가는 지형 중심이 아닌 Doom과 마찬가지의, 투사체와 적들의 돌진을 이동으로 회피하는 이동 중심의 FPS이기에, 플레이어는 이동과 조준/사격의 이원화 체계를 적극 활용하도록 요구받는다. 선만을 이동했던 Doom의 조준과 달리 Quake는 면을 이동하기에 요구되는 조준의 정확도가 훨씬 더 높다. 거기다 플랫폼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으로만 점프가 가능했던 Doom II와 달리, 독자적으로 추가된 점프 액션에 걸맞은 여러 비좁고 추락하기 쉬운 플랫폼들이 Doom II보다도 자주 등장하여, 플랫포밍의 중요성 또한 크게 증가했다.
Doom의 에피소드 1에서 창의 활용이 후반부 미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두드러졌듯, Quake 또한 에피소드의 후반부와 후반부 에피소드로 갈수록 복층과 플랫포밍 난관의 활용이 심화된다. 그렇기에 사실 에피소드 1과 2의 초반부는 복층이라고 해보았자 대부분 2층이나 드문 경우 3층 정도까지만 구현해놓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Quake의 수직성이 상당히 잘 드러나는데, Ogre라는 적의 추가로 인해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와 적의 높이차가 전투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Ogre는 플레이어도 사용 가능한 장비 중 하나인 Grenade Launcher, 유탄 발사기(가칭이며 정식 명칭은 없다)를 주무장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시간차를 두고 폭발하는 유탄을 발사한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궤적으로 발사되는 이 유탄은 벽에 부딪히더라도 폭발하지 않고 다만 튕겨나갈 뿐이기에, Ogre는 플레이어와 굳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단순히 플레이어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큰 압박이 된다. 낮은 벽 저편이나 아니면 난간으로 가려진 높은 층에 머물러 플레이어의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더라도, 벽에 튕겨나간다는 유탄의 특성을 활용하여 플레이어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플레이어가 보다 높은 층의 Ogre를 조준하여 사격하는 것은 동일한 층에 함께 위치했을 때보다 훨씬 어려운데, 이것은 낮은 위치에서는 높은 위치의 오브젝티브가 높은 층의 바닥에 상당 부분 가려지게 되어 플레이어의 조준/사격이 동일한 위치의 오브젝티브를 상대할 때보다 세밀하고 적확할 것을 요구하는 탓이다. 반대로 플레이어가 더 높은 층에 자리했을 경우엔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거기다 Quake의 복층적인 레벨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먼저 낮은 층을 지나간 후 위로 기어 올라가서 높은 층을 지나도록 요구하지,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언제나 먼저 지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높은 층의 Ogre를 상대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며, 상대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도 낮은 층의 적들의 육탄 방어로 인해 난감하다. 거기다 높은 층에서는 이동에 조금만 실수가 있더라도 곧바로 아래층으로 떨어질 위험이 언제나 도사린다. Ogre가 Quake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적들보다도 복층적인 레벨 디자인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Quake란 게임을 상징하는 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후반부 에피소드에선 이와 같은 특징이 더욱 부각되고 강화된다. 단순히 1층과 2층으로 구분하여 2층에 Ogre를 배치하는 것 말고도, 여러 창으로 가로막힌 높은 지점에 Ogre를 배치하고 플레이어가 그 주변을 계속해서 빙빙 돌게 만듦으로써 시종일관 Ogre의 공격에 견제당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Ogre가 아닌 Shambler를 활용하여(Doom의 Archvile과 사실상 동일하되 더 위협적인 적이다) 플레이어를 괴롭히기도 한다.
단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Quake의 Nightmare 난이도는 적들의 공격 속도를 가속화할 뿐, Doom의 Nightmare와 달리 적들을 부활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창 너머의 적을 사전에 처치하며 손쉽게 나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여 언제나 다른 구역의 적들로부터의 사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Doom과 달리 Quake는 적을 처리하는 것이 까다로울 뿐, 일단 처리해놓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난관 진행이 상당히 수월해지는 구조이다. 적이 부활하는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다만 에피소드 4의 미션 3을 제외하고는 적들이 부활하는 함정을 본 적이 없다) Doom에 비해선 각각의 구간들이 슈팅을 통해 유기적으로 엮여 있도록 하는 통일성이 크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이는 사실 Quake의 레벨 디자인이 Doom과는 상이하기 때문도 있다. Doom은 어디까지나 퍼즐 풀이와 길 찾기, 동선 설정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고 전투는 그것을 보조할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그러한 1차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반드시 액션이라는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Doom II는 순수한 액션 게임이었지만, 모든 전투를 다 제대로 수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단지 플레이어의 앞길을 막는 적들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한 방의 적들을 모조리 처리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Quake는 다르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부각되기 시작한 작품이다. Doom과 달리 폐쇄적인 아레나가 다수 등장하며, 길은 열려 있더라도 적들을 모조리 처치하지 않으면 적들의 육탄 방어로 인해 사실상의 진행이 불가능한 구간도 상당하다. 즉 Quake는 던전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아레나 전투의 선형적 연속이 차지한 대표적인 Arena Shooter였으며, 이러한 형식은 대부분의 현대 FPS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 비단 FPS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투 중심 3D 액션 게임들은 이와 같은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이러한 디자인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Doom II가 모든 방면에서 Doom의 상위호환인 것과 달리, Quake의 아레나 전투 중심의 선형적인 레벨 디자인은 Doom과 Doom II의 던전 중심의 레벨 디자인의 발전형 내지는 완벽한 상위호환은 아니다. 둘은 그냥 다른 방식의 레벨 디자인이며, 사실 어느 관점에서는 발전이 아닌 퇴보한 형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장점이라면 일단 던전에 비해 플레이어의 이동 동선을 제한하기가 쉬워 보다 완성도 높은 전투 시퀀스를 갖출 수 있다. 플레이어의 이동 동선을 중심으로 운신을 방해하는 함정들과 근거리 적들, 그리고 플레이어를 먼 곳에서 저격하는 원거리 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Quake는 Doom이나 Doom II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함정들과 기구, 그리고 환경 위험Environment Hazard이 소개되고 레벨의 일부로 활용된다. 이러한 함정들은 존재만으로 플레이어가 안전하게 이동 가능한 범위에 제한을 두기에, 적들과 함께 플레이어를 적절히 압박한다. 이를 통해 id Software가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공평한 경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어도 윤리적으로 노력하긴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다. Doom II는 이미 이동 동선에 지나친 제약을 두지 않더라도 완성도 높은 전투 시퀀스들을 배치하는 방법론을 이미 구현해놓았다. 앞선 비평에서 지적한 바대로, 그것은 바로 플레이어가 선택 가능한 모든 동선에다 적들과 함정 트리거 등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즉 오직 레벨 디자인의 관점에서만 파악했을 때(후술하겠지만, 적 디자인과 공격 체계 자체는 Quake가 Doom에서 크게 발전했다) Quake는 Doom II의 비선형성과 개방적인 던전 디자인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전투에 있어서도 딱히 특별한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은 것이며, 오히려 다소 퇴보했다고까지 지적 가능하다.
사실 에피소드 4는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과 상당히 유사하게 디자인된 미션들을 다량 선보이는데, 이것들마저 그렇게 우수하진 않다. 아니, 이전 에피소드들에서 보여준 복층적 레벨 디자인을 다소 포기하고 평면적인 샌드박스 레벨만을 구현하는 데에만 몰두한 이유로 에피소드 4는 오히려 그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수준이 떨어진다. 폐쇄적인 아레나가 사실상 전무하여 플레이어는 적들과의 거리를 너무나도 쉽게 벌릴 수 있으며, 또 에피소드 1에서 3까지를 지배하던 Ogre의 등장 빈도가 크게 준 대신 근거리 적들이 지나치게 많이 추가되어 거리 불문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조준’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 한다. 거기다 등장하는 적들의 수 자체가 Doom에 비해 상당히 감소했고 평면상의 이동만 가능했던 Doom과 달리 점프를 통해 층들을 오가거나 관성 점프로 가속화하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큰 리스크를 지는 선택들을 할 당위가 없다.
결국 조준의 폭력성이란 멀티 플레이어에서 가장 돋보이고 싱글 플레이 캠페인에선 적 디자인에 따라 상당히 가감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Quake 또한 적어도 히트 스캔 적들을 소개하거나 폐쇄적이고 비좁게 전투 공간을 제한해야만 비교적 공정한 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고 적어도 후자의 경우 에피소드 1부터 3까지는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에피소드 1에서 3까지의 미션들은 에피소드 1의 마지막 보스전을 제외하고는 전부 우수하다. 특히 더 상세히 후술하겠지만 Ogre와 Shambler, 그리고 Vore의 활용이 돋보인다. 이들을 어떻게 어디에 배치하면 더 세심하고 유려하게 플레이어를 괴롭힐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oom II에 비해선 지나치게 쉽고, 정적이다. Doom II의 적들로만 이루어진 던전이 형성하던 비선형적이고 동적인 광기는 사라지고 없다.
그런 이유로 레벨 디자인에서 Quake는 Doom II에서 크게 퇴보하였다고 본다. 게임 진행이 어떤 하나의 유기적인 던전을 깨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와 완벽히 분리된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각각의 전투 난관들을 순서대로 풀어나가는 것에 가깝다. 사실상 길 찾기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플레이어는 그냥 앞으로만 쭉 가기만 하면 길이 알아서 열린다. 여전히 Quake의 레벨들은 우수한 3D 레벨 디자인의 선례이지만, Doom II에 비해선 아쉽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레벨 디자인만 따질 경우에만 가능한 평가이다. 사실 Quake를 보다 가치 있는 경기로 만드는 것은 레벨 디자인보다는 전투 시스템의 설계이다. 먼저 공격 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Doom은 무기 교체 딜레이가 존재하기에 전투 중에 무기를 교체할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의 실책이다. 던전을 여러 부분으로 쪼갠 후 각각의 부분에서 사용할 무기를 사전에 생각해두고 해당 부분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무기를 교체한 후 난관을 돌파해야 죽지 않고 제대로 된 게임 진행이 가능하다. 무기 교체가 영향을 받는 변수는 레벨 디자인과 적, 무기, 그리고 탄약 배치라는 고정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레벨을 깨나갈 때 무기를 교체하는 순서 자체는 거의 언제나 똑같다. 가령 Imp나 Soldier 같이 체력이 적은 적들이 포진되어 있는 통로를 빠르게 지나가야 하는 지점에선 체인건이나 플라즈마 라이플을, 먼 거리에서 적들을 먼저 처리한 후 지나가는 것이 가능한 지점에선 로켓 런처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Adventure와 RPG 형식의 작품에서 각각의 퍼즐들에 대한 답을 전부 사전에 생각해두고 던전에 진입하여 퍼즐들을 맞닥뜨렸을 때 답들을 올바른 순서로 차례대로 제시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만큼 Doom의 무기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정해진 정답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하다.(링크)
반면 Quake의 무기들은 특정한 ‘상황’이 아닌 적과의 ‘거리’에 따라 무기의 유용성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즉 근거리, 중거리, 원거리에서 유용한 무기들로 명확히 분류되어 있다. 슈퍼 샷건은 근거리에서, 네일건과 슈퍼 네일건은 중거리에서, 로켓 런처는 원거리에서, 샷건과 썬더볼트는 근거리와 중거리 모두에서, 그리고 유탄 발사기는 적과 플레이어의 높이차가 나는 경우에 유리하다. 중요한 건 적과의 거리는 전투 중엔 끊임없이 변동한다는 점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무기 교체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정적이지 않고 동적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전투 중에 변화하는 적과의 거리에 따라 끊임없이 무기를 교체하며 전투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으며, 특히 Doom과 달리 무기 교체 딜레이도 전혀 없고 다만 재장전 시간 딜레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무기 교체를 더욱 장려한다. 소위 말하는 ‘무기 콤보’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탄약 수급은 여전히 각 레벨마다 고정된 위치에서만 이루어지기에 무기를 계속 교체해가며 플레이하지 않을 시 탄약 부족에 시달리기가 쉬우며, 또 탄약 여분을 고려하여 플레이 스타일을 끊임없이 바꿔주게 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전투’ 하나만 떼어놓고 보자면 플레이어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선택 가능한 의미 있는 선택지들이 Doom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으며, 또 그만큼 게임이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바도 더 많다.
이러한 무기 교체 콤보는 사실 Quake가 키보드와 마우스로 플레이되는 게임이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번부터 8번까지 할당된 무기들을 플레이어는 원하는 순간에 단순히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즉시 꺼내어 쓸 수 있는데, 동시대의 콘솔 콘트롤러로는 이와 동일한 조작 체계를 갖추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또 적들은 2D 게임이나 2.5D 게임에 비해 3D 게임에서 보다 복잡한 역할을 부여받는 경향이 강한데, Doom과 Quake의 적들도 마찬가지의 차이를 보인다. Doom에서의 적들은 사실 Archvile과 Pain Elemental을 제외하면 각각의 적들이 다른 적들과 구분되는 자기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Zombieman과 Shotgun Guy와 Heavy Weapon Dude는 물론 서로 체력도 공격력도 다 다르지만, 이들이 전투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그냥 뭉뚱그려서 ‘히트 스캔’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시야에 들어올 시 곧바로 발사하는 것. 또 Mancubus와 Caco Demon, Hell Knight, Baron of Hell, Arachnotron, Imp는 물론 적마다 체력과 공격력, 투사체 속도와 투사체 수 모두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전투에서의 역할은 그냥 ‘투사체’로 요약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무빙을 통해 회피하도록 요구하는 것. Spectre와 Pinky 역시 그냥 지그재그로 돌진해오는 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즉 Doom의 적 종류는 사실상 6개라도 보아도 무방하다. 히트 스캔, 투사체, 근거리, Lost Soul, Archvile, 그리고 Pain Elemental.
물론 적들은 체력과 경직률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 또한 단순히 체력이 높은 적과 낮은 적, 그리고 경직률이 높은 적과 낮은 적으로 이분법적으로만 구분되는 경향이 강하다. 가령 Imp, Zombieman, Shotgun Guy, Heavey Weapon Dude, Lost Soul은 체력이 낮고 경직률이 높으므로 앞으로 밀고 나가야할 땐 체인건이나 플라즈마 라이플로, 조금 여유가 있다면 슈퍼 샷건이나 로켓 런처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반면 Mancubus, Caco, Hell Knight, Arachnotron, Pain Elemental은 체력이 높기 때문에 체인건으로 상대하는 것이 전혀 권장되지 않으며, 밀고 나가야 할 땐 플라즈마 라이플로, 조금 여유가 있거나 무빙할 공간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로켓 런처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즉, 분명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도록 ‘충분히’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적들이 전투에 있어 그 적만이 수행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는 전혀 없다. 그냥 히트 스캔과 투사체, 체력이 높은 적과 낮은 적 정도로만 구분될 뿐이다.
Doom의 적 디자인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Doom 비평에서도 밝힌 바 있듯, 이 정도로만 각각의 적들에 차별화를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수하다. 다만 나는, Quake가 이렇게 충분히 우수한 Doom의 적 디자인보다도 훨씬 진보한 적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Quake의 적들은 각각이 모두 독특하고 서로와 명확히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Grunt와 Enforcer, 그리고 Rottweller 정도는 예외이긴 하나 이들은 어차피 각 에피소드의 첫 번째 미션에서만 등장하는 말하자면 튜토리얼용 몹 정도에 불과하다. Zombie는 반드시 폭발형 무기나 쿼드라 버프를 받은 상태의 슈퍼 샷건으로 처치해야만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 Knight는 일반적인 근거리 적이고, Death Knight는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을 플레이어와의 거리에 따라 끊임없이 바꿔 써주며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Fiend 또한 근거리 적이지만 플레이어를 향해 먼 거리를 일직선으로 도약하여 공격하기 때문에 좌우로의 이동을 요구한다. Scrag는 날아다니는 Enforcer와 같은 유닛인데, 날아다닌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개성적이다. 그야말로 온갖 곳에 배치가 가능하고 또 유탄 발사기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특성을 지닌다. Ogre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서술한 바 있으니 생략하겠다. Spawn은 사망 시 폭발하면서 주변에 광역 피해를 입히며, Fiend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플레이어를 향해 돌진해온다. Vore는 플레이어를 추적하는 미사일을 발사하는데, 이것의 유도 성능은 Revenant보다 훨씬 우수하기에 지형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Shambler는 Archivile과 유사하지만, Archivile에 비해 공격 속도가 훨씬 빠르고 공격의 선딜레이 또한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적 역시 Vore와 마찬가지로 지형을 활용하도록 요구하는데, 상술했듯 Quake는 지형 중심이 아닌 이동 중심 FPS이다. 끊임없이 플레이어로 돌진해오는 적들과 발사되는 투사체들을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회피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Vore와 Shambler는 이동으로는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지형을 통해선 쉽게 회피 가능한 공격을 구사한다. 즉 Vore와 Shambler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플레이어가 적들을 상대함에 있어 고려해야 하는 변수가 훨씬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도록 만든다.
물론 이들은 1대1의 상황에선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다대일 상황에서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말하자면 하나하나가 체스 피스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Doom Eternal의 구조가 Doom보다는 Quake에 훨씬 더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무기 콤보와 적 디자인, 전투 중심의 선형적인 Arena Shooter라는 점에서 특히. 또 Ultrakill이나 Dusk, Doom(2016) 등의 현대의 FPS들 역시 모두 Doom이 아닌 Quake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히려 Doom II의 비선형적이고 유기적인 던전 디자인을 계승하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만큼 Doom II는 2.5D란 형식에서만 가능했던 독특하고, 계보가 단절된 작품에 가깝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Doom II가 비록 경기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앞서 레벨 디자인을 다루는 문단에서 설명한 바 있듯 Quake에 비해 우수하나, 3D FPS라는 하나의 형식을 새롭게 제시하고 그것이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는 절대 Quake를 하대할 수 없으며, 심지어 Quake가 Doom II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Doom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싱글 플레이어 한정 id Software의 황금기는 그렇게 Doom과 Doom II, 그리고 Quake를 내놓고 끝이 났다. Doom 개발을 이끌었던 존 로메로와 Doom II의 장점과 가치를 완성한 샌디 피터슨은 Quake에서 전체 미션의 1/4씩을 도맡아 디자인한 후 id Software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Quake 이후로 id Software가 내놓은 숱한 작품들은 Doom과 Quake의 이름으로 출시되었음에도 전혀 그 이름에 부합하는 경기를 선보이지 못 했다. Quake II나 Doom 3이나 모두 기술적으로는 당대의 다른 게임들에 비해 크게 앞서 있었음에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수준 이하의 구조만을 갖추는 데 그친 것이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게임의 발전이 전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과, 게임에서 진정으로 불멸할 가치가 있는 것은 기술적 성취가 아닌 게임의 구조, 혹은 경기 그 자체임을 증명한다.
실기 PC
1. The Illusion of a Technical Marvel
당연하게도, Doom에서 Doom II로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힘은 두 가지였다. 기술의 발전과 게임, 즉 경기 구조의 발전이다. 게임 개발에서의 기술적 성취를 게임 그 자체보다도 높이 평가하거나 적어도 동일시하는 컨슈머들의 생각과 달리, 이 둘은 완전히 동치된다고 볼 수 없다. 쉽게 말해, 기술의 발전은 게임 디자이너가 경기의 구성 요소로서 활용 가능한 도구의 범위에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고, 게임의 발전은 경기 구조의 발전, 즉 게임의 진보 그 자체이다. Doom II가 Doom보다 더 우수한 경기인 이유는 그것이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으며 심지어 서사마저 함유한 비선형성을 띄었고, 플랫포밍과 슈팅, 관성의 활용, 이동 등 기존의 액션 시스템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장점과 요소를 난관의 디자인을 통해 풍부히 활용했거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활용토록 요구하기 때문이다.(링크)
분명 이러한 디자인이 Doom II에 이르러 기술이 더 발전하였고 따라서 더 많은 적들을 한 레벨 안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이 발전하여 더 많은 적들을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만 그치는 것과, 그 가능성을 백방 활용하여 꽃피우는 것은 전혀 동일시할 수 없다. 전자가 기술가들의 몫이라면 후자야말로 바로 게임 디자인의 몫인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AAA 게임 개발사들과 그들의 양산형 작품들을 소비하는(플레이와 소비는 다르다) 컨슈머들은 이 차이에 대해 무지하다. 물론 시각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경기라는 게임의 특성 상 그래픽의 중요성을 간과할 이유는 없고(다만 좀 예쁠 뿐인 그래픽과 경기에 다방면으로 기여하는 시각적 신호로서의 그래픽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프로그램이라는 또 다른 특성으로 인해 발전한 기술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래픽이나 단순히 사물들과의 무의미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 또는 사실적인 모션 따위의 것들로 게임이 고평가 받아야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게임은 결국 경기의 구조에서 시작되고 구조에서 끝난다. 이러한 경기의 구조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멸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구조의 진보를 이끌어 내거나 뒷받침해줄 때에나 의미 있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불멸하지도 않는다. 고작 3년만 지나도 낡아버리는 것이 기술이다. 게임은 경기이지 기술이 아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과격하게 축약하자면, 클래식 Doom 시절 id Software의 기술가는 엔진 개발의 주축이었던 존 카맥이었고 게임 디자인은 존 로메로(Doom)와 샌디 피터슨(Doom II)의 몫이었다. 물론 경기 디자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존 카맥의 작업에도 대단한 의의가 있지만, 결국 Doom은 사실상 존 로메로의 게임이었고 Doom II는 사실상 샌디 피터슨의 게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Doom의 우수한 무기체계와 에피소드 1의 슈팅을 통해 통일되는 던전은 전적으로 존 로메로의 위업이고, Doom II의 의미 있는 비선형성과 서사, 그리고 적들로 구성한 던전을 갖춘 샌드박스 레벨들은 전적으로 샌디 피터슨의 위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의 열거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새삼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Quake(퀘이크 1)>란 작품 또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모두 숙지한 상태여야 그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탓이다. FPS가 한때 기술의 선도자 역할을 맡았던 것은, FPS란 형식 자체가 3D의 구현이 기술적으로 난감했던 시기에, 3D 게임의 특성들을 본질적으로 함유한 채로 탄생하고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FPS는 아직 대부분의 개발사들이 구현할 기술적 여건을 갖추지 못 했던 3D 게임을, 구현할 수 있어야만 제작할 수 있었던 형식이었고, 또 3D 공간의 더 다양한 부분들을 활용키 위해선 3D 구현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요구되었으므로, 당연히 FPS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발전에 발전이 거듭되어 마침내 Quake라는 완전한 3D 게임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술했듯 모든 발전된 기술이 진보한 게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의 수많은 AAA 게임들이 몸소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Quake란 작품의 의의는 단순히 완전하면서도 완벽한 최초의 3D FPS라는 데에 있지 않다. 완전하고 완벽한 3D 공간을 구현한 후, 게임 디자인을 통해 그러한 공간에 걸맞은 여러 시스템과 규칙을 갖추어 합당한 3D 게임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데 있다. 단순히 3D 공간에 대한 기술력으로만 따지자면 당연하게도 Quake를 뛰어넘는 액션 게임들은 지금 시점에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3D 공간을 게임 디자인을 통해 경기의 중추로서 전폭적으로 활용한 작품은, Quake가 발매된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만큼 3D 액션 게임 명작은 희귀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2020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의 먼 미래에도, 어쩌면 게임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까지, 게이머들과 경기의 창작자들이 Quake에 주목하고 그것을 직접 플레이해보아야 할 이유이다.
언제나 그렇듯, 본 비평 역시 최고 난이도인 Nightmare만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최고 난이도가 아닌 그 외의 난이도로만 엔딩을 보고 마는 것은, 그 최고 난이도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게임을 중도 포기하고 끝까지 플레이하지 않은 것과 일말의 차이도 없이 같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 비평하는 것과 문예를 끝까지 읽지 않고 비평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듯, 게임 또한 마찬가지의 기준에서 평가받을 가치가 있는 창작물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Nightmare란 난이도가 게임의 가치에 크게 기여하는 Doom이나 별달리 기여치 않는 Quake는 모두 동일하게 최고 난이도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그것만이 유일히 타당한 기준이다. 이는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2. 3D
Quake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완전한 3D 게임의 구현이다. 다만 이것은 앞서 언급하였듯 완전한 3D 공간의 구현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가령 3D 공간을 구현한 작품은 Quake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Ultima Underworld와 System Shock는 아예 게임 내 등장하는 모든 아이템과 투사체 등을 전부 3D 오브젝티브로 구현하여 물리 엔진의 영향 또한 받도록 한 바 있고, 심지어 시점을 위 아래로 돌리는 것까지 가능했다. 루킹 글래스의 시대를 앞선 위대한 작품들 말고도, Quake 이전의 작품인 Duke Nukem 3D 또한 시점을 위 아래로 돌려가며 퍼즐을 풀거나 비밀을 찾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심지어 Doom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복층적인 레벨 디자인마저 이미 구현해놓고 있었다. 즉 완전한 3D 공간의 구현은 Quake 이전에도 이미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Quake의 업적이 될 수는 없다.
Quake의 진정한 업적은, 그러한 완전한 3D 공간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는 마우스 포인트를 구현하였다는 데 있다. Ultima Underworld나 System Shock, Duke Nukem 3D 등의 작품들은 시선을 위 아래로 돌리는 것은 가능하였으나 그것이 마우스 이동을 통해서가 아닌 별도의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것으로 행해졌다. 반면 Quake는 X축 선상에 갇혀 있던 Doom의 마우스 포인트를 해방하여, 하나의 선이 아닌 면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기존의 FPS에는 없었지만 현대의 FPS에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조준’을 최초로 구현한 것이다. Quake를 통해 FPS는 이제 완전히 콘솔 게임에서 벗어나 키보드와 마우스로 플레이하는 PC 게임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자동 조준 보정은 콘솔에서만의 불가피한 그러나 동시에 FPS의 가치를 훼손하는 선택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타 액션 게임 형식과 구분되는 FPS란 형식의 가장 마초적인 특징은 플레이어가 바라보는 곳에 즉시 타격을 가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 어떤 형식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폭력적이다. 과거 <Ninja Gaiden 2(닌자 가이덴 2)>의 비평에서 게임에서의 폭력과 경쟁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또 얼마나 경쟁적인가의 척도로 각각의 선택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실리는가, 다시 말해 리스크와 리워드의 균형이 어떠한가를 내세웠으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워드야말로 가장 경쟁적이고 가장 폭력적임을 설명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밀리 액션 게임인 Ninja Gaiden 2를 기준으로 설명한 것이다. NG2에선 어쨌거나 적을 타격하고자 한다면 플레이어가 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즉 플레이어가 자신의 ‘극도로 폭력적인 공격’을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거리가, 현재 장비한 무기의 길이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무기의 길이를 적확히 파악할 수 있는 3인칭이 밀리 액션 게임에 1인칭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그 길이 바깥쪽의 적에겐 플레이어가 당장의 폭력을 행사할 방도가 사실상 없거나 적어도 근거리에 비해선 빈약하며, 이러한 원거리에서는 게임의 경쟁성이 큰 폭으로 하락한다. 적들과의 전투가 강제되지 않은 구간들은 아예 달려서 아무런 피해 없이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이기에, 밀리 액션 게임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단점을 어떠한 방식으로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아예 폐쇄적인 아레나 전투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진 NG2는 이와 같은 단점이 노출되지 않지만, Ninja Gaiden Black에선 미약하게나마 드러나며, <Dark Souls 3(다크 소울즈 3)>와 <Sekiro(세키로)>는 아예 이 점을 전혀 고려치 않고(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설계된 레벨로 인해 필드 전투 모두가 완전히 아무런 가치도 없이 무의미해졌다. 이 단점을 제대로 해결한, 아레나 전투의 연속이 아닌 3D 밀리 액션 게임은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안개 진입 딜레이를 추가하고 완벽한 적과 함정 배치를 통해 단순히 달려서 지나가는 행위 자체도 난관으로 만들어버린 Dark Souls 2뿐이다.
그런데 FPS에선 그러한 ‘무기의 길이’라는 개념이 게임에 끼치는 영향이 희박한 게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플레이어가 특정한 적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화면을 돌려 그 정중앙에 적을 놓은 후 마우스 좌 클릭을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거리의 제한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물론 적도 마찬가지이다. 공격 시스템에 대해선 이후 좀 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Quake를 조준을 제하고 단순히 공격 시스템으로만 NG2와 비교하였을 경우, Quake는 NG2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순하고 정적인 작품이다. Quake에는 NG2와는 달리 한순간의 거리 조절 실수를 곧바로 캐치하여 일격사에 가까운 피해를 가할 만한 적의 위협적인 패턴도 없고, 반드시 무적 프레임을 적확히 활용해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폭탄 수리검 난사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유순하고 정적인 공격이 플레이어와 적간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화면을 돌리는 것만으로(그리고 적에게 있어선 단순히 고개를 돌려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극도로 경쟁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플레이어와 적이 모두 총기를 사용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총이야말로 그 어떤 무기보다도 게임에 잘 어울리는 무기일지 모른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조준은 두 적대적인 경쟁자 간의 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어디까지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위에 한해서이다) 각각의 선택들이 지닌 리스크와 리워드가 그 어떤 형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복싱 경기에서 링의 넓이를 비교적 좁게 제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근거리 격투는 공간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면 폭력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탓이다. Dark Souls 1과 Demon's Souls에서 자꾸만 플레이어를 좁디좁은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러한 상황에서만 적들이 플레이어를 상대로 그나마 공평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FPS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비좁은 아레나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경기의 폭력성이 언제나 일정 수치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경기의 긴장감이 시종일관 경기의 기저에 깔려 있다. FPS에서의 조준엔 바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FPS의 특성은 사실 싱글 플레이보다는 모든 경기자가 동일한 위력의 장비를 갖추고 경쟁하는 멀티 플레이어 경기에서 보다 돋보이며, Doom과 Quake의 인기를 견인했던 것 역시 멀티 플레이어 모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조준을 구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게임이 단번에 우수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멀티 플레이어 게임은 플레이어와 상대방이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하여 애초부터 공평하게 경쟁한다면, 싱글 플레이어 게임은 양쪽의 경기자(플레이어와 게임)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에 가깝다. 무슨 말이냐면, NG2 비평에서도 밝힌 바 있듯, 다대일 전투는 사실상 멀티 플레이어에서의 상대방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특징들을 여러 적들로 쪼개어 플레이어와 대적하게 함으로써 AI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디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와 게임이 최소한 공평하게나마 경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컨슈머들의 통념과 달리 대부분의 게임들은 사실 플레이어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게임은 반드시 여러 창의적인 방식들로 플레이어를 방해해야할 윤리적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마땅히 다하지 않았을 경우 게으른 디자인이라 비판받게 된다. 가령 Doom의 경우 마우스가 X축 선상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고 Y축 상의 적들은 자동 조준 보정을 통해서만 타격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Doom II는 바로 그러한 점을 활용하여 플레이어가 대처하기 어려운 난관을 구성했다.(링크) 즉 자동 조준 보정 또한 플레이어가 넘어서고 극복해야만 하는 하나의 난관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자동 조준 보정을 없애고 아예 Y축 상에서도 자유로이 조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현한다면? 당연히 경기는 붕괴하고 만다.
궁금하다면 GZDOOM을 통해 free look 옵션을 체크한 후 Doom과 Doom II를 플레이해보길 바란다.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조준과 사격에 적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애초에 Y축 상의 마우스 포인트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시스템 하에서만 의미 있는 레벨 디자인인 것이다. 이것은 레이싱 카를 타고 경쟁하는 경주에서 플레이어를 초음속 제트기에 태운 후 심지어 다른 레이싱 카를 어떤 미국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들을 동원해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게 허용하는 것과 같다. 레이싱 카만을 통해 경쟁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는 스포츠이므로, 당연히 경주는 붕괴하고야 만다. 과거 비평한 바 있던 Sekiro 역시 갈고리의 추가 하나만으로 레벨 디자인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았던가.
즉 3D 공간과 3D 마우스를 구현했다면 그러한 자유로운 조준을 백방 활용해야만 간신히 돌파가 가능한 레벨 디자인을 응당 갖추어야 그나마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비교적 공평한 경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Half-Life 2나 Call of Duty(싱글 플레이 캠페인 한정)가 저급한 FPS 경기의 당연한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물론 다른 수많은 이유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완전한 3D 공간을 구현하기만 했을 뿐 사실상 마우스 포인트의 이동은 X축 선상에서만 이루어지더라도 돌파 가능한, 말하자면 일자 복도나 다름없는 싸구려 레벨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 크다. 이미 Quake가 몇 년 앞서서 3D FPS의 레벨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경기의 붕괴를 방지할 수 있는가를 제대로 선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분명 이러한 디자인이 Doom II에 이르러 기술이 더 발전하였고 따라서 더 많은 적들을 한 레벨 안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이 발전하여 더 많은 적들을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에만 그치는 것과, 그 가능성을 백방 활용하여 꽃피우는 것은 전혀 동일시할 수 없다. 전자가 기술가들의 몫이라면 후자야말로 바로 게임 디자인의 몫인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AAA 게임 개발사들과 그들의 양산형 작품들을 소비하는(플레이와 소비는 다르다) 컨슈머들은 이 차이에 대해 무지하다. 물론 시각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경기라는 게임의 특성 상 그래픽의 중요성을 간과할 이유는 없고(다만 좀 예쁠 뿐인 그래픽과 경기에 다방면으로 기여하는 시각적 신호로서의 그래픽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프로그램이라는 또 다른 특성으로 인해 발전한 기술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래픽이나 단순히 사물들과의 무의미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사실, 또는 사실적인 모션 따위의 것들로 게임이 고평가 받아야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게임은 결국 경기의 구조에서 시작되고 구조에서 끝난다. 이러한 경기의 구조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멸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구조의 진보를 이끌어 내거나 뒷받침해줄 때에나 의미 있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불멸하지도 않는다. 고작 3년만 지나도 낡아버리는 것이 기술이다. 게임은 경기이지 기술이 아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과격하게 축약하자면, 클래식 Doom 시절 id Software의 기술가는 엔진 개발의 주축이었던 존 카맥이었고 게임 디자인은 존 로메로(Doom)와 샌디 피터슨(Doom II)의 몫이었다. 물론 경기 디자인이 이루어질 수 있는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존 카맥의 작업에도 대단한 의의가 있지만, 결국 Doom은 사실상 존 로메로의 게임이었고 Doom II는 사실상 샌디 피터슨의 게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Doom의 우수한 무기체계와 에피소드 1의 슈팅을 통해 통일되는 던전은 전적으로 존 로메로의 위업이고, Doom II의 의미 있는 비선형성과 서사, 그리고 적들로 구성한 던전을 갖춘 샌드박스 레벨들은 전적으로 샌디 피터슨의 위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의 열거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새삼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Quake(퀘이크 1)>란 작품 또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모두 숙지한 상태여야 그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탓이다. FPS가 한때 기술의 선도자 역할을 맡았던 것은, FPS란 형식 자체가 3D의 구현이 기술적으로 난감했던 시기에, 3D 게임의 특성들을 본질적으로 함유한 채로 탄생하고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FPS는 아직 대부분의 개발사들이 구현할 기술적 여건을 갖추지 못 했던 3D 게임을, 구현할 수 있어야만 제작할 수 있었던 형식이었고, 또 3D 공간의 더 다양한 부분들을 활용키 위해선 3D 구현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요구되었으므로, 당연히 FPS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발전에 발전이 거듭되어 마침내 Quake라는 완전한 3D 게임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술했듯 모든 발전된 기술이 진보한 게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의 수많은 AAA 게임들이 몸소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Quake란 작품의 의의는 단순히 완전하면서도 완벽한 최초의 3D FPS라는 데에 있지 않다. 완전하고 완벽한 3D 공간을 구현한 후, 게임 디자인을 통해 그러한 공간에 걸맞은 여러 시스템과 규칙을 갖추어 합당한 3D 게임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데 있다. 단순히 3D 공간에 대한 기술력으로만 따지자면 당연하게도 Quake를 뛰어넘는 액션 게임들은 지금 시점에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3D 공간을 게임 디자인을 통해 경기의 중추로서 전폭적으로 활용한 작품은, Quake가 발매된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만큼 3D 액션 게임 명작은 희귀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2020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의 먼 미래에도, 어쩌면 게임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까지, 게이머들과 경기의 창작자들이 Quake에 주목하고 그것을 직접 플레이해보아야 할 이유이다.
언제나 그렇듯, 본 비평 역시 최고 난이도인 Nightmare만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최고 난이도가 아닌 그 외의 난이도로만 엔딩을 보고 마는 것은, 그 최고 난이도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게임을 중도 포기하고 끝까지 플레이하지 않은 것과 일말의 차이도 없이 같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 비평하는 것과 문예를 끝까지 읽지 않고 비평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듯, 게임 또한 마찬가지의 기준에서 평가받을 가치가 있는 창작물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Nightmare란 난이도가 게임의 가치에 크게 기여하는 Doom이나 별달리 기여치 않는 Quake는 모두 동일하게 최고 난이도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그것만이 유일히 타당한 기준이다. 이는 언제나 그래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2. 3D
2-1. Aiming
Quake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완전한 3D 게임의 구현이다. 다만 이것은 앞서 언급하였듯 완전한 3D 공간의 구현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가령 3D 공간을 구현한 작품은 Quake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Ultima Underworld와 System Shock는 아예 게임 내 등장하는 모든 아이템과 투사체 등을 전부 3D 오브젝티브로 구현하여 물리 엔진의 영향 또한 받도록 한 바 있고, 심지어 시점을 위 아래로 돌리는 것까지 가능했다. 루킹 글래스의 시대를 앞선 위대한 작품들 말고도, Quake 이전의 작품인 Duke Nukem 3D 또한 시점을 위 아래로 돌려가며 퍼즐을 풀거나 비밀을 찾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심지어 Doom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복층적인 레벨 디자인마저 이미 구현해놓고 있었다. 즉 완전한 3D 공간의 구현은 Quake 이전에도 이미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Quake의 업적이 될 수는 없다.
Quake의 진정한 업적은, 그러한 완전한 3D 공간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는 마우스 포인트를 구현하였다는 데 있다. Ultima Underworld나 System Shock, Duke Nukem 3D 등의 작품들은 시선을 위 아래로 돌리는 것은 가능하였으나 그것이 마우스 이동을 통해서가 아닌 별도의 키보드 자판을 누르는 것으로 행해졌다. 반면 Quake는 X축 선상에 갇혀 있던 Doom의 마우스 포인트를 해방하여, 하나의 선이 아닌 면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기존의 FPS에는 없었지만 현대의 FPS에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 ‘조준’을 최초로 구현한 것이다. Quake를 통해 FPS는 이제 완전히 콘솔 게임에서 벗어나 키보드와 마우스로 플레이하는 PC 게임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자동 조준 보정은 콘솔에서만의 불가피한 그러나 동시에 FPS의 가치를 훼손하는 선택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타 액션 게임 형식과 구분되는 FPS란 형식의 가장 마초적인 특징은 플레이어가 바라보는 곳에 즉시 타격을 가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 어떤 형식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폭력적이다. 과거 <Ninja Gaiden 2(닌자 가이덴 2)>의 비평에서 게임에서의 폭력과 경쟁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한 바 있다. 또 얼마나 경쟁적인가의 척도로 각각의 선택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실리는가, 다시 말해 리스크와 리워드의 균형이 어떠한가를 내세웠으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워드야말로 가장 경쟁적이고 가장 폭력적임을 설명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밀리 액션 게임인 Ninja Gaiden 2를 기준으로 설명한 것이다. NG2에선 어쨌거나 적을 타격하고자 한다면 플레이어가 적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즉 플레이어가 자신의 ‘극도로 폭력적인 공격’을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거리가, 현재 장비한 무기의 길이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무기의 길이를 적확히 파악할 수 있는 3인칭이 밀리 액션 게임에 1인칭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그 길이 바깥쪽의 적에겐 플레이어가 당장의 폭력을 행사할 방도가 사실상 없거나 적어도 근거리에 비해선 빈약하며, 이러한 원거리에서는 게임의 경쟁성이 큰 폭으로 하락한다. 적들과의 전투가 강제되지 않은 구간들은 아예 달려서 아무런 피해 없이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이기에, 밀리 액션 게임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단점을 어떠한 방식으로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아예 폐쇄적인 아레나 전투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진 NG2는 이와 같은 단점이 노출되지 않지만, Ninja Gaiden Black에선 미약하게나마 드러나며, <Dark Souls 3(다크 소울즈 3)>와 <Sekiro(세키로)>는 아예 이 점을 전혀 고려치 않고(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설계된 레벨로 인해 필드 전투 모두가 완전히 아무런 가치도 없이 무의미해졌다. 이 단점을 제대로 해결한, 아레나 전투의 연속이 아닌 3D 밀리 액션 게임은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안개 진입 딜레이를 추가하고 완벽한 적과 함정 배치를 통해 단순히 달려서 지나가는 행위 자체도 난관으로 만들어버린 Dark Souls 2뿐이다.
그런데 FPS에선 그러한 ‘무기의 길이’라는 개념이 게임에 끼치는 영향이 희박한 게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플레이어가 특정한 적에게 폭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화면을 돌려 그 정중앙에 적을 놓은 후 마우스 좌 클릭을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거리의 제한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물론 적도 마찬가지이다. 공격 시스템에 대해선 이후 좀 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Quake를 조준을 제하고 단순히 공격 시스템으로만 NG2와 비교하였을 경우, Quake는 NG2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순하고 정적인 작품이다. Quake에는 NG2와는 달리 한순간의 거리 조절 실수를 곧바로 캐치하여 일격사에 가까운 피해를 가할 만한 적의 위협적인 패턴도 없고, 반드시 무적 프레임을 적확히 활용해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폭탄 수리검 난사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유순하고 정적인 공격이 플레이어와 적간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화면을 돌리는 것만으로(그리고 적에게 있어선 단순히 고개를 돌려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극도로 경쟁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플레이어와 적이 모두 총기를 사용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총이야말로 그 어떤 무기보다도 게임에 잘 어울리는 무기일지 모른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조준은 두 적대적인 경쟁자 간의 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어디까지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위에 한해서이다) 각각의 선택들이 지닌 리스크와 리워드가 그 어떤 형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복싱 경기에서 링의 넓이를 비교적 좁게 제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근거리 격투는 공간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면 폭력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탓이다. Dark Souls 1과 Demon's Souls에서 자꾸만 플레이어를 좁디좁은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러한 상황에서만 적들이 플레이어를 상대로 그나마 공평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FPS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비좁은 아레나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경기의 폭력성이 언제나 일정 수치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경기의 긴장감이 시종일관 경기의 기저에 깔려 있다. FPS에서의 조준엔 바로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FPS의 특성은 사실 싱글 플레이보다는 모든 경기자가 동일한 위력의 장비를 갖추고 경쟁하는 멀티 플레이어 경기에서 보다 돋보이며, Doom과 Quake의 인기를 견인했던 것 역시 멀티 플레이어 모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2. Multilayered
그렇기에 자유로운 조준을 구현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게임이 단번에 우수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멀티 플레이어 게임은 플레이어와 상대방이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하여 애초부터 공평하게 경쟁한다면, 싱글 플레이어 게임은 양쪽의 경기자(플레이어와 게임)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에 가깝다. 무슨 말이냐면, NG2 비평에서도 밝힌 바 있듯, 다대일 전투는 사실상 멀티 플레이어에서의 상대방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특징들을 여러 적들로 쪼개어 플레이어와 대적하게 함으로써 AI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디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와 게임이 최소한 공평하게나마 경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컨슈머들의 통념과 달리 대부분의 게임들은 사실 플레이어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게임은 반드시 여러 창의적인 방식들로 플레이어를 방해해야할 윤리적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마땅히 다하지 않았을 경우 게으른 디자인이라 비판받게 된다. 가령 Doom의 경우 마우스가 X축 선상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고 Y축 상의 적들은 자동 조준 보정을 통해서만 타격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Doom II는 바로 그러한 점을 활용하여 플레이어가 대처하기 어려운 난관을 구성했다.(링크) 즉 자동 조준 보정 또한 플레이어가 넘어서고 극복해야만 하는 하나의 난관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자동 조준 보정을 없애고 아예 Y축 상에서도 자유로이 조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현한다면? 당연히 경기는 붕괴하고 만다.
궁금하다면 GZDOOM을 통해 free look 옵션을 체크한 후 Doom과 Doom II를 플레이해보길 바란다.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조준과 사격에 적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애초에 Y축 상의 마우스 포인트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시스템 하에서만 의미 있는 레벨 디자인인 것이다. 이것은 레이싱 카를 타고 경쟁하는 경주에서 플레이어를 초음속 제트기에 태운 후 심지어 다른 레이싱 카를 어떤 미국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들을 동원해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게 허용하는 것과 같다. 레이싱 카만을 통해 경쟁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는 스포츠이므로, 당연히 경주는 붕괴하고야 만다. 과거 비평한 바 있던 Sekiro 역시 갈고리의 추가 하나만으로 레벨 디자인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았던가.
즉 3D 공간과 3D 마우스를 구현했다면 그러한 자유로운 조준을 백방 활용해야만 간신히 돌파가 가능한 레벨 디자인을 응당 갖추어야 그나마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비교적 공평한 경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Half-Life 2나 Call of Duty(싱글 플레이 캠페인 한정)가 저급한 FPS 경기의 당연한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물론 다른 수많은 이유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완전한 3D 공간을 구현하기만 했을 뿐 사실상 마우스 포인트의 이동은 X축 선상에서만 이루어지더라도 돌파 가능한, 말하자면 일자 복도나 다름없는 싸구려 레벨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 크다. 이미 Quake가 몇 년 앞서서 3D FPS의 레벨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경기의 붕괴를 방지할 수 있는가를 제대로 선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변화한 시스템에 맞추어 Quake는 먼저 모든 레벨들을 복층으로 설계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깨나가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층들을 수직적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층들에 적들을 배치하고, 층과 층 사이는 전부 창문 등을 통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져 있도록 했다. 즉 평면적으로 배치된 각각의 구역들이 슈팅을 통해 서로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한 Doom의 철학을, 수직적으로 쌓아 올려 복층으로 구현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단 평면의 디자인을 수직적으로 활용 및 확장한 것에 가깝다. 각각의 층들은 동일한 X와 Y 좌표 상에 있고 또 창문이나 텅 빈 공간이 층과 층을 분리해놓고 있어 슈팅을 통해선 서로와 상호작용 가능하나, Z 좌표 상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도구가 없는 Quake의 특성 상 플레이어의 이동은 철저히 위에서 아래로만 이루어질 수 있고 그 역은 불가하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어떤 층에 있든 간에 다른 층의 적들로부터 공격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들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반드시 프리 룩 조준을 적확히 활용해야만 한다. 또 Quake는 커버 뒤와 뒤를 오가는 지형 중심이 아닌 Doom과 마찬가지의, 투사체와 적들의 돌진을 이동으로 회피하는 이동 중심의 FPS이기에, 플레이어는 이동과 조준/사격의 이원화 체계를 적극 활용하도록 요구받는다. 선만을 이동했던 Doom의 조준과 달리 Quake는 면을 이동하기에 요구되는 조준의 정확도가 훨씬 더 높다. 거기다 플랫폼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으로만 점프가 가능했던 Doom II와 달리, 독자적으로 추가된 점프 액션에 걸맞은 여러 비좁고 추락하기 쉬운 플랫폼들이 Doom II보다도 자주 등장하여, 플랫포밍의 중요성 또한 크게 증가했다.
Doom의 에피소드 1에서 창의 활용이 후반부 미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두드러졌듯, Quake 또한 에피소드의 후반부와 후반부 에피소드로 갈수록 복층과 플랫포밍 난관의 활용이 심화된다. 그렇기에 사실 에피소드 1과 2의 초반부는 복층이라고 해보았자 대부분 2층이나 드문 경우 3층 정도까지만 구현해놓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Quake의 수직성이 상당히 잘 드러나는데, Ogre라는 적의 추가로 인해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와 적의 높이차가 전투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Ogre는 플레이어도 사용 가능한 장비 중 하나인 Grenade Launcher, 유탄 발사기(가칭이며 정식 명칭은 없다)를 주무장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시간차를 두고 폭발하는 유탄을 발사한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궤적으로 발사되는 이 유탄은 벽에 부딪히더라도 폭발하지 않고 다만 튕겨나갈 뿐이기에, Ogre는 플레이어와 굳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단순히 플레이어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큰 압박이 된다. 낮은 벽 저편이나 아니면 난간으로 가려진 높은 층에 머물러 플레이어의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더라도, 벽에 튕겨나간다는 유탄의 특성을 활용하여 플레이어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플레이어가 보다 높은 층의 Ogre를 조준하여 사격하는 것은 동일한 층에 함께 위치했을 때보다 훨씬 어려운데, 이것은 낮은 위치에서는 높은 위치의 오브젝티브가 높은 층의 바닥에 상당 부분 가려지게 되어 플레이어의 조준/사격이 동일한 위치의 오브젝티브를 상대할 때보다 세밀하고 적확할 것을 요구하는 탓이다. 반대로 플레이어가 더 높은 층에 자리했을 경우엔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거기다 Quake의 복층적인 레벨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먼저 낮은 층을 지나간 후 위로 기어 올라가서 높은 층을 지나도록 요구하지, 그 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언제나 먼저 지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높은 층의 Ogre를 상대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며, 상대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도 낮은 층의 적들의 육탄 방어로 인해 난감하다. 거기다 높은 층에서는 이동에 조금만 실수가 있더라도 곧바로 아래층으로 떨어질 위험이 언제나 도사린다. Ogre가 Quake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적들보다도 복층적인 레벨 디자인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사실상 Quake란 게임을 상징하는 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후반부 에피소드에선 이와 같은 특징이 더욱 부각되고 강화된다. 단순히 1층과 2층으로 구분하여 2층에 Ogre를 배치하는 것 말고도, 여러 창으로 가로막힌 높은 지점에 Ogre를 배치하고 플레이어가 그 주변을 계속해서 빙빙 돌게 만듦으로써 시종일관 Ogre의 공격에 견제당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Ogre가 아닌 Shambler를 활용하여(Doom의 Archvile과 사실상 동일하되 더 위협적인 적이다) 플레이어를 괴롭히기도 한다.
단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Quake의 Nightmare 난이도는 적들의 공격 속도를 가속화할 뿐, Doom의 Nightmare와 달리 적들을 부활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창 너머의 적을 사전에 처치하며 손쉽게 나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여 언제나 다른 구역의 적들로부터의 사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Doom과 달리 Quake는 적을 처리하는 것이 까다로울 뿐, 일단 처리해놓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난관 진행이 상당히 수월해지는 구조이다. 적이 부활하는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다만 에피소드 4의 미션 3을 제외하고는 적들이 부활하는 함정을 본 적이 없다) Doom에 비해선 각각의 구간들이 슈팅을 통해 유기적으로 엮여 있도록 하는 통일성이 크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2-3. Arena Shooter
이는 사실 Quake의 레벨 디자인이 Doom과는 상이하기 때문도 있다. Doom은 어디까지나 퍼즐 풀이와 길 찾기, 동선 설정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고 전투는 그것을 보조할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그러한 1차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반드시 액션이라는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Doom II는 순수한 액션 게임이었지만, 모든 전투를 다 제대로 수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단지 플레이어의 앞길을 막는 적들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한 방의 적들을 모조리 처리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Quake는 다르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부각되기 시작한 작품이다. Doom과 달리 폐쇄적인 아레나가 다수 등장하며, 길은 열려 있더라도 적들을 모조리 처치하지 않으면 적들의 육탄 방어로 인해 사실상의 진행이 불가능한 구간도 상당하다. 즉 Quake는 던전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아레나 전투의 선형적 연속이 차지한 대표적인 Arena Shooter였으며, 이러한 형식은 대부분의 현대 FPS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 비단 FPS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투 중심 3D 액션 게임들은 이와 같은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이러한 디자인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Doom II가 모든 방면에서 Doom의 상위호환인 것과 달리, Quake의 아레나 전투 중심의 선형적인 레벨 디자인은 Doom과 Doom II의 던전 중심의 레벨 디자인의 발전형 내지는 완벽한 상위호환은 아니다. 둘은 그냥 다른 방식의 레벨 디자인이며, 사실 어느 관점에서는 발전이 아닌 퇴보한 형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장점이라면 일단 던전에 비해 플레이어의 이동 동선을 제한하기가 쉬워 보다 완성도 높은 전투 시퀀스를 갖출 수 있다. 플레이어의 이동 동선을 중심으로 운신을 방해하는 함정들과 근거리 적들, 그리고 플레이어를 먼 곳에서 저격하는 원거리 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Quake는 Doom이나 Doom II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함정들과 기구, 그리고 환경 위험Environment Hazard이 소개되고 레벨의 일부로 활용된다. 이러한 함정들은 존재만으로 플레이어가 안전하게 이동 가능한 범위에 제한을 두기에, 적들과 함께 플레이어를 적절히 압박한다. 이를 통해 id Software가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공평한 경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어도 윤리적으로 노력하긴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다. Doom II는 이미 이동 동선에 지나친 제약을 두지 않더라도 완성도 높은 전투 시퀀스들을 배치하는 방법론을 이미 구현해놓았다. 앞선 비평에서 지적한 바대로, 그것은 바로 플레이어가 선택 가능한 모든 동선에다 적들과 함정 트리거 등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즉 오직 레벨 디자인의 관점에서만 파악했을 때(후술하겠지만, 적 디자인과 공격 체계 자체는 Quake가 Doom에서 크게 발전했다) Quake는 Doom II의 비선형성과 개방적인 던전 디자인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전투에 있어서도 딱히 특별한 발전이 이루어지진 않은 것이며, 오히려 다소 퇴보했다고까지 지적 가능하다.
사실 에피소드 4는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과 상당히 유사하게 디자인된 미션들을 다량 선보이는데, 이것들마저 그렇게 우수하진 않다. 아니, 이전 에피소드들에서 보여준 복층적 레벨 디자인을 다소 포기하고 평면적인 샌드박스 레벨만을 구현하는 데에만 몰두한 이유로 에피소드 4는 오히려 그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수준이 떨어진다. 폐쇄적인 아레나가 사실상 전무하여 플레이어는 적들과의 거리를 너무나도 쉽게 벌릴 수 있으며, 또 에피소드 1에서 3까지를 지배하던 Ogre의 등장 빈도가 크게 준 대신 근거리 적들이 지나치게 많이 추가되어 거리 불문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조준’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 한다. 거기다 등장하는 적들의 수 자체가 Doom에 비해 상당히 감소했고 평면상의 이동만 가능했던 Doom과 달리 점프를 통해 층들을 오가거나 관성 점프로 가속화하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큰 리스크를 지는 선택들을 할 당위가 없다.
결국 조준의 폭력성이란 멀티 플레이어에서 가장 돋보이고 싱글 플레이 캠페인에선 적 디자인에 따라 상당히 가감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Quake 또한 적어도 히트 스캔 적들을 소개하거나 폐쇄적이고 비좁게 전투 공간을 제한해야만 비교적 공정한 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고 적어도 후자의 경우 에피소드 1부터 3까지는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에피소드 1에서 3까지의 미션들은 에피소드 1의 마지막 보스전을 제외하고는 전부 우수하다. 특히 더 상세히 후술하겠지만 Ogre와 Shambler, 그리고 Vore의 활용이 돋보인다. 이들을 어떻게 어디에 배치하면 더 세심하고 유려하게 플레이어를 괴롭힐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oom II에 비해선 지나치게 쉽고, 정적이다. Doom II의 적들로만 이루어진 던전이 형성하던 비선형적이고 동적인 광기는 사라지고 없다.
그런 이유로 레벨 디자인에서 Quake는 Doom II에서 크게 퇴보하였다고 본다. 게임 진행이 어떤 하나의 유기적인 던전을 깨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와 완벽히 분리된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각각의 전투 난관들을 순서대로 풀어나가는 것에 가깝다. 사실상 길 찾기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플레이어는 그냥 앞으로만 쭉 가기만 하면 길이 알아서 열린다. 여전히 Quake의 레벨들은 우수한 3D 레벨 디자인의 선례이지만, Doom II에 비해선 아쉽다.
3. Combat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레벨 디자인만 따질 경우에만 가능한 평가이다. 사실 Quake를 보다 가치 있는 경기로 만드는 것은 레벨 디자인보다는 전투 시스템의 설계이다. 먼저 공격 체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Doom은 무기 교체 딜레이가 존재하기에 전투 중에 무기를 교체할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의 실책이다. 던전을 여러 부분으로 쪼갠 후 각각의 부분에서 사용할 무기를 사전에 생각해두고 해당 부분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무기를 교체한 후 난관을 돌파해야 죽지 않고 제대로 된 게임 진행이 가능하다. 무기 교체가 영향을 받는 변수는 레벨 디자인과 적, 무기, 그리고 탄약 배치라는 고정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레벨을 깨나갈 때 무기를 교체하는 순서 자체는 거의 언제나 똑같다. 가령 Imp나 Soldier 같이 체력이 적은 적들이 포진되어 있는 통로를 빠르게 지나가야 하는 지점에선 체인건이나 플라즈마 라이플을, 먼 거리에서 적들을 먼저 처리한 후 지나가는 것이 가능한 지점에선 로켓 런처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Adventure와 RPG 형식의 작품에서 각각의 퍼즐들에 대한 답을 전부 사전에 생각해두고 던전에 진입하여 퍼즐들을 맞닥뜨렸을 때 답들을 올바른 순서로 차례대로 제시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만큼 Doom의 무기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정해진 정답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하다.(링크)
반면 Quake의 무기들은 특정한 ‘상황’이 아닌 적과의 ‘거리’에 따라 무기의 유용성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즉 근거리, 중거리, 원거리에서 유용한 무기들로 명확히 분류되어 있다. 슈퍼 샷건은 근거리에서, 네일건과 슈퍼 네일건은 중거리에서, 로켓 런처는 원거리에서, 샷건과 썬더볼트는 근거리와 중거리 모두에서, 그리고 유탄 발사기는 적과 플레이어의 높이차가 나는 경우에 유리하다. 중요한 건 적과의 거리는 전투 중엔 끊임없이 변동한다는 점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무기 교체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정적이지 않고 동적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전투 중에 변화하는 적과의 거리에 따라 끊임없이 무기를 교체하며 전투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으며, 특히 Doom과 달리 무기 교체 딜레이도 전혀 없고 다만 재장전 시간 딜레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무기 교체를 더욱 장려한다. 소위 말하는 ‘무기 콤보’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탄약 수급은 여전히 각 레벨마다 고정된 위치에서만 이루어지기에 무기를 계속 교체해가며 플레이하지 않을 시 탄약 부족에 시달리기가 쉬우며, 또 탄약 여분을 고려하여 플레이 스타일을 끊임없이 바꿔주게 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전투’ 하나만 떼어놓고 보자면 플레이어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선택 가능한 의미 있는 선택지들이 Doom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으며, 또 그만큼 게임이 전투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바도 더 많다.
이러한 무기 교체 콤보는 사실 Quake가 키보드와 마우스로 플레이되는 게임이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번부터 8번까지 할당된 무기들을 플레이어는 원하는 순간에 단순히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즉시 꺼내어 쓸 수 있는데, 동시대의 콘솔 콘트롤러로는 이와 동일한 조작 체계를 갖추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또 적들은 2D 게임이나 2.5D 게임에 비해 3D 게임에서 보다 복잡한 역할을 부여받는 경향이 강한데, Doom과 Quake의 적들도 마찬가지의 차이를 보인다. Doom에서의 적들은 사실 Archvile과 Pain Elemental을 제외하면 각각의 적들이 다른 적들과 구분되는 자기자신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Zombieman과 Shotgun Guy와 Heavy Weapon Dude는 물론 서로 체력도 공격력도 다 다르지만, 이들이 전투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그냥 뭉뚱그려서 ‘히트 스캔’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시야에 들어올 시 곧바로 발사하는 것. 또 Mancubus와 Caco Demon, Hell Knight, Baron of Hell, Arachnotron, Imp는 물론 적마다 체력과 공격력, 투사체 속도와 투사체 수 모두 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전투에서의 역할은 그냥 ‘투사체’로 요약될 수 있다. 플레이어가 무빙을 통해 회피하도록 요구하는 것. Spectre와 Pinky 역시 그냥 지그재그로 돌진해오는 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즉 Doom의 적 종류는 사실상 6개라도 보아도 무방하다. 히트 스캔, 투사체, 근거리, Lost Soul, Archvile, 그리고 Pain Elemental.
물론 적들은 체력과 경직률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 또한 단순히 체력이 높은 적과 낮은 적, 그리고 경직률이 높은 적과 낮은 적으로 이분법적으로만 구분되는 경향이 강하다. 가령 Imp, Zombieman, Shotgun Guy, Heavey Weapon Dude, Lost Soul은 체력이 낮고 경직률이 높으므로 앞으로 밀고 나가야할 땐 체인건이나 플라즈마 라이플로, 조금 여유가 있다면 슈퍼 샷건이나 로켓 런처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반면 Mancubus, Caco, Hell Knight, Arachnotron, Pain Elemental은 체력이 높기 때문에 체인건으로 상대하는 것이 전혀 권장되지 않으며, 밀고 나가야 할 땐 플라즈마 라이플로, 조금 여유가 있거나 무빙할 공간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로켓 런처로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즉, 분명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도록 ‘충분히’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적들이 전투에 있어 그 적만이 수행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는 전혀 없다. 그냥 히트 스캔과 투사체, 체력이 높은 적과 낮은 적 정도로만 구분될 뿐이다.
Doom의 적 디자인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Doom 비평에서도 밝힌 바 있듯, 이 정도로만 각각의 적들에 차별화를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수하다. 다만 나는, Quake가 이렇게 충분히 우수한 Doom의 적 디자인보다도 훨씬 진보한 적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Quake의 적들은 각각이 모두 독특하고 서로와 명확히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Grunt와 Enforcer, 그리고 Rottweller 정도는 예외이긴 하나 이들은 어차피 각 에피소드의 첫 번째 미션에서만 등장하는 말하자면 튜토리얼용 몹 정도에 불과하다. Zombie는 반드시 폭발형 무기나 쿼드라 버프를 받은 상태의 슈퍼 샷건으로 처치해야만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 Knight는 일반적인 근거리 적이고, Death Knight는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을 플레이어와의 거리에 따라 끊임없이 바꿔 써주며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Fiend 또한 근거리 적이지만 플레이어를 향해 먼 거리를 일직선으로 도약하여 공격하기 때문에 좌우로의 이동을 요구한다. Scrag는 날아다니는 Enforcer와 같은 유닛인데, 날아다닌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개성적이다. 그야말로 온갖 곳에 배치가 가능하고 또 유탄 발사기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특성을 지닌다. Ogre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서술한 바 있으니 생략하겠다. Spawn은 사망 시 폭발하면서 주변에 광역 피해를 입히며, Fiend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플레이어를 향해 돌진해온다. Vore는 플레이어를 추적하는 미사일을 발사하는데, 이것의 유도 성능은 Revenant보다 훨씬 우수하기에 지형을 활용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Shambler는 Archivile과 유사하지만, Archivile에 비해 공격 속도가 훨씬 빠르고 공격의 선딜레이 또한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적 역시 Vore와 마찬가지로 지형을 활용하도록 요구하는데, 상술했듯 Quake는 지형 중심이 아닌 이동 중심 FPS이다. 끊임없이 플레이어로 돌진해오는 적들과 발사되는 투사체들을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회피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Vore와 Shambler는 이동으로는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지형을 통해선 쉽게 회피 가능한 공격을 구사한다. 즉 Vore와 Shambler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플레이어가 적들을 상대함에 있어 고려해야 하는 변수가 훨씬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도록 만든다.
물론 이들은 1대1의 상황에선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다대일 상황에서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말하자면 하나하나가 체스 피스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Doom Eternal의 구조가 Doom보다는 Quake에 훨씬 더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무기 콤보와 적 디자인, 전투 중심의 선형적인 Arena Shooter라는 점에서 특히. 또 Ultrakill이나 Dusk, Doom(2016) 등의 현대의 FPS들 역시 모두 Doom이 아닌 Quake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오히려 Doom II의 비선형적이고 유기적인 던전 디자인을 계승하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만큼 Doom II는 2.5D란 형식에서만 가능했던 독특하고, 계보가 단절된 작품에 가깝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Doom II가 비록 경기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앞서 레벨 디자인을 다루는 문단에서 설명한 바 있듯 Quake에 비해 우수하나, 3D FPS라는 하나의 형식을 새롭게 제시하고 그것이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는 절대 Quake를 하대할 수 없으며, 심지어 Quake가 Doom II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Doom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싱글 플레이어 한정 id Software의 황금기는 그렇게 Doom과 Doom II, 그리고 Quake를 내놓고 끝이 났다. Doom 개발을 이끌었던 존 로메로와 Doom II의 장점과 가치를 완성한 샌디 피터슨은 Quake에서 전체 미션의 1/4씩을 도맡아 디자인한 후 id Software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Quake 이후로 id Software가 내놓은 숱한 작품들은 Doom과 Quake의 이름으로 출시되었음에도 전혀 그 이름에 부합하는 경기를 선보이지 못 했다. Quake II나 Doom 3이나 모두 기술적으로는 당대의 다른 게임들에 비해 크게 앞서 있었음에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수준 이하의 구조만을 갖추는 데 그친 것이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게임의 발전이 전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과, 게임에서 진정으로 불멸할 가치가 있는 것은 기술적 성취가 아닌 게임의 구조, 혹은 경기 그 자체임을 증명한다.
★★★★★
5/5
- Lee Yin
Next; Quake II, Doom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