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1994.10.14.
개발사 id Software
디자이너 American McGee, Sandy Petersen, Shawn Green
프로그래머 Dave Taylor, John Carmack, John Romero
실기 PC


id Chronicles (1) 링크
id Chronicles (2) 링크

1. Demo 

  Doom은 여러 방면에서 과도기적 작품이었다. 물론 DRPG와 액션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형식, FPS를 탄생시켰으며, 에피소드 1, Knee-Deep in the Dead가 게임사에 길이 남을 완성도를 갖춘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단 하나의 에피소드, 9개의 레벨들만으로 Doom은 3D 액션 게임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심지어 Doom의 영향을 받아 지형지물이 전투의 중추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2D 슈터들도 있을 정도이니, 비단 3D에 국한되지 않고 액션 게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표적으로 Vlambeer의 역작 <Nuclear Throne(뉴클리어 쓰론)>이 그렇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은 액션과 어드벤처 요소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오히려 에피소드 2와 3은 에피소드 1의 최대 장점인 슈팅으로 통일된 레벨 디자인을 포기하고 DRPG의 던전들의 열화에 지나지 않는 수준으로 퇴보했다. DRPG의 1인칭 시점으로 모험하는 3D 공간과 콘솔 게임의 액션을 완벽히 융합해 FPS를 완성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액션과 어드벤처의 융화나 FPS에 어울리는 심화된 레벨 디자인을 선보이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FPS에 어울리는 레벨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결국 에피소드 1의 던전들은 액션으로 통일되며, 따라서 에피소드 1의 장점 또한 액션이다. 턴제로 진행되는 DRPG의 던전은 정적이다. 해답이 하나 정해져 있는 퍼즐과, 그 구조를 쉬이 알기 어려우나 일단 알아내기만 한다면 해결이 훨씬 수월해지는 함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던전을 깨나가는 과정은 철저히 비선형적이고, 랜덤 인카운터와 주사위 굴림 등의 변수 요인도 충분하나, 결국 DRPG에서 가장 강대한 적은 그러한 동적인 변수가 아닌 고정되고 정적인 함정과 퍼즐, 즉 던전 구조 그 자체이다. 심지어 전투마저도 각각의 층에 필요한 파티 조합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훨씬 수월해지므로, 변수가 적다 할 수 있다.

  반면 에피소드 1, 즉 액션은 동적이다. 변수 요인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적들이 계속 부활하여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슈팅하기에, 던전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한 것 이상으로, 적들과의 전투를 완벽히 수행하고 최적의 경로로 던전을 지나가는 것을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액션 수행 능력’이 요구된다. 각각의 적들을 슈팅으로 죽이고 무빙으로 빠르게 그들의 공격을 회피하거나 난관을 지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다대한 변수의 실시간 압박에 대한 플레이어의 실시간 판단과 입력을 통한 대응이란 말로 요약 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액션성이며, 실시간의 형식을 채택하지 않은 고전 DRPG가 가질 수 없는 가치이다.

  즉 에피소드 1의 장점이자 가치는 결국 액션에서 비롯한다. 액션성이 줄고 더 이상 슈팅으로 구역들이 상호작용하지 않는 에피소드 2와 3은, 비록 던전 구조 자체는 에피소드 1보다 복잡할지언정, DRPG의 열화 반복에 지나지 않는 철학으로 디자인되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수준이 떨어지는 레벨들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에피소드 1의 장점들을 모두 포기하고 다시 DRPG로 회귀 내지는 퇴보했기에, Doom은 과도기적 작품이다. 여전히 FPS와, 단순히 실시간으로 진행될 뿐이고 흥미로운 전투를 보유한 열화 RPG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Doom II: Hell on Earth(둠 2)>는 이와 다르다. Doom의 최대 장점을 적극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진일보했다. 물론, Doom과 Doom II의 시스템, 즉 무기 체계나 관성 등은 거의 완벽히 동일하다. 슈퍼 샷건의 유무만이 거의 유일한 차이이다. 시스템이 완벽히 똑같은데 다르면 얼마나 다를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치트나 공략을 악용하는 컨슈머들은 Doom II가 단순히 Doom의 확장팩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이들에게 Doom II를 상징하는 것은 슈퍼 샷건의 연속과 IDDQD일 뿐이다.

  이는 치트 플레이와 공략을 보는 것이 완전히 그릇된 것만큼이나 틀린 견해이다. 물론 Doom II는 Doom과 동일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게임은 시스템이 완전히 동일하다 할지라도, 난관의 변화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합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Doom II는 그런 작품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전작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레벨 디자인을 선보였던 샌디 피터슨은 Doom II에 와선 그 재능이 만개했고, Doom의 에피소드 1과 무기 체계를 홀로 디자인한 존 로메로나 새로이 영입된 아메리칸 맥기 또한 Doom에 비해 훨씬 진보되고 FPS에 적합한 레벨들을 디자인했다. 사실, Doom이 사실상 존 로메로의 게임이라면, Doom II는 레벨들의 대부분을 홀로 제작한 샌디 피터슨의 게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단순히 가장 많은 일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Doom II의 장점들이 모두 샌디 피터슨만의 개성적인 레벨 디자인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샌디 피터슨의 Doom II는 Doom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더욱 발전시키고 단점들은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사실상 Doom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Doom II가 Doom의 확장판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Doom이 Doom II의 데모인 것이다. Doom만으로도 id Software는 액션 게임의 역사에 빠져선 안 되는 개발사로 남았을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더 거대한 무언가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2. Platform to Platform 

  클래식 Doom 시리즈는 넓은 틀에서 보자면 Action과 Adventure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Action은 콘솔 게임에서, Adventure는 PC 게임에서 가져왔음을 앞서 반복하여 강조한 바 있고 실제로 Doom까지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Doom II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Action이란 형식이 오롯이 콘솔 게임만의 것이 아니었듯, Adventure의 형식은 비단 PC 게임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각 플랫폼의 주류 형식이 그것들일 뿐이었다. 특히 그 당시 닌텐도의 게임들은 대부분 Action만큼이나 Adventure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Metroid(메트로이드)>나 Zelda는 물론이고 <Kirby(커비)>와 Super Mario 또한 그렇다.

  Zork나 Ultima, 그리고 Wizardry와 같은 PC 어드벤처 게임들과 Super Mario나 Metroid와 같은 콘솔 어드벤처 게임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모험과 탐색, 그리고 퍼즐 풀이가 액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사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가이다. 물론 플레이어의 모든 ‘액션’에는 먼저 ‘사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깰 수 있는 게임은 가치가 매우 떨어지고 저급하며 사실상 게임이라 보기도 어려운 디지털 폐기물들밖에 없다. 사고는 그만큼 모든 게임의 핵심이자 기반이다. 그러나 PC 게임의 문제 풀이가 사고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면, Super Mario와 Metroid는 그러한 사고를 실시간 입력으로 정확히 수행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야 한다. Super Mario 1에서 특정 경로로 플랫폼을 지나가야만 진행할 수 있는 레벨들이나, Super Mario 3에서 등껍질을 잡아 하늘로 올라가야만 깰 수 있는 퍼즐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게임들의 Adventure는 그 문제 풀이에서 반드시 Action을 요구하며, 따라서 Adventure의 요소들이 모두 Action으로 수렴한다.

  반면 Adventure에 속한 DRPG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id의 3D 삼부작이나 Doom에서는 그러한 액션을 통한 모험과 탐색, 퍼즐 풀이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각각의 문을 열 수 있는 키 카드를 찾고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 풀이의 모든 것이다. Doom의 관성을 활용한 움직임과 지형지물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슈팅이 모두 Super Mario의 플랫폼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점프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Doom에 대한 Super Mario의 영향은 그뿐이었다. Doom의 Adventure는 결국 콘솔 게임이 아닌 PC 게임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Doom II에서 완전히 바뀐다. 관성을 활용한 움직임이 매우 중요한 문제 풀이 수단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적의 투사체 공격을 피하거나 Pinky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하고, 히트 스캔 적들로부터 도망쳐 지형 뒤에 숨는 등의 활동에서 이미 이동은 Doom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결국 전투에만 국한된 것이다. Doom II는 전투뿐만 아니라, 길 찾기나 탐색, 모험, 비밀 발견, 퍼즐 풀이 등 그야말로 게임의 다른 모든 부분조차, 모두 액션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게임의 모든 요소가 액션으로 수렴한다.

  그러한 액션으로의 수렴을 위해 Doom II는 플랫포밍 난관들을 레벨의 곳곳에 대거 배치했다. 실시간의 형식을 채택한 Adventure 게임들은 필연적으로 액션을 통한 모험과 탐색으로 귀결하거나 적어도 그것의 활용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액션을 통한 모험 또한 보통은 플랫포밍으로 귀결한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모험하는 것에, 한 플랫폼에서 다른 플랫폼으로 점프하는 플랫포밍만큼이나 어울리는 문제 해결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콘솔 Adventure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Wizardry와 Ultima의 계보에 속한 Ultima Underworld만 하더라도 플랫포밍 난관이 다수 존재하지 않은가? 미지의 장소로의 모험과 미지의 플랫폼으로의 점프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 것이다.

  플랫포밍은 또 탐험Exploration을 모험Adventure으로 바꿔준다. 모험은 본질적으로 리스크가 내재되어 있다. 위험 지역을 모험하는 것은, 온갖 함정과 장애물 등의 리스크를 딛고 올라서는 것이다. 반면 탐험은 단순히 한 지역의 곳곳을 누비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엔 리스크가 없거나 부족하다. 플랫포밍엔 성공과 실패가 있다. 다음 플랫폼에 정확히 안착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결정된다. 즉 본질적으로 플레이어의 모든 점프에 어떤 리스크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것은 모험의 본질과 같다. 단순히 A에서 B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과, A에서 B 플랫폼으로 ‘점프’하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서 언급한 Doom의 적 부활 메커니즘 또한 모든 탐색을 탐험이 아닌 모험으로 탈바꿈시킨다. 적들의 부활뿐만 아니라 특정 위치에 도달했을 시 발동되는 함정이나 여러 기믹 등 또한 그렇다. 플레이어의 모든 슈팅과 이동에 리스크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것은 모험의 정의를 충족한다. 다만 이와 같은 모험은 결국 다회차에선 별 의미가 없어진다. 게임을 돌파할 경로를 알아내기만 한다면 각각의 매커니즘이 가진 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술한 ‘Doom에선 최적의 동선을 짜는 것이 곧 난관의 풀이로 직결한다’는 문장은, 결국 최적의 동선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모든 모험이 탐험으로 격하됨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Doom은 에피소드 1을 제외하면 액션성/다회차성, 그리고 모험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반면 플랫포밍을 통해서만 게임 진행이 가능하거나 적어도 수월해지도록 한다는 것은, 결국 몇 회차를 플레이하든 플랫포밍을 정확히 수행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최단 경로를 알아내는 것이 곧 문제 풀이로 직결하는 것을 방지한다. 다시 말해, 최단 경로를 알아내었다 하더라도, 게임은 여전히 탐험이 아닌 모험으로서 기능한다. 문제 풀이가 단순히 사고에서만 끝나지 않고, 보다 수준 높은 액션을 한 차례 더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Doom II의 플랫포밍 난관들은 게임에 액션성을 부여한다. 보상이 매우 뛰어난 몇몇 비밀들에 접근하기 위해선 단순히 맵의 어딘가에 숨은 버튼을 누르거나 벽에 달라붙어 비비기만 하면 되었던 Doom과 달리, Doom II는 플랫포밍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예컨대 맵 3에선 대각선 이동으로 최대 속도에 도달한 후 점프해야만 접근 가능한 비밀이 있고, 맵 6도 관성을 최대한 축적해야만 도달 가능한 위치에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스위치가 배치되어 있다. 또 같은 맵의 다른 곳에 배치된 비밀은, 플랫폼의 특정한 위치에서만 점프해야만 도달 가능하도록 했다. 단순히 가장 높은 위치에서 점프하면 벽에 부딪혀서 비밀이 놓인 플랫폼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위에서 두 번째 계단에서 점프해야만 한다. 




  플랫포밍의 난도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맵 15에선 최대 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텔레포트 발판과, 최소 관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모두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난관으로 등장한다. 또 건물들의 높이를 파악하여,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어떤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서 점프해야 하는가 또한 계산해야 한다. 적들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고 관성을 잘 유지하여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서 점프해야만 얻을 수 있는 메가 스피어도 존재한다.




  또 비단 플랫포밍이 아니더라도, 레벨 디자인 자체가 지형이 플레이어의 움직임에 제약을 두는 경향이 강해졌다. 비좁은 플랫폼을 통과하거나 그 위에서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맵 24, The Chasm의 특정 구간은 매우 비좁은 절벽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계속 플레이어에게로 돌진해오는 Lost Soul을 향해 슈팅하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플레이를 요구한다. 또한 맵 26 The Abandoned Mines는 굽이친 절벽의 요지마다 배치된 Imp와 날아다니며 플레이어를 향해 슈팅하는 Caco Demon을 제거하거나 무시하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하며, 그 구간을 지난 후엔 마찬가지로 비좁은 절벽에서 Mancubus와 Baron of Hell을 상대하거나, 매우 정확한 점프를 구사하여 키 카드만을 획득하고 빠져나와야만 게임 진행이 가능하게 짜여 있다.




  이처럼 게임 진행에 있어 반드시 타파해야 하는 플랫포밍 난관들이 많기 때문에, 이젠 단순히 최단 경로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게임을 쉽게 깰 수 없다. 플랫포밍 또한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 물론 플랫포밍 자체의 난도가 낮지 않은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액션성은 결국 플레이어의 게임 진행을 방해하는 변수의 역할도 겸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슛 정확도가 90%에 달하는 선수도 어떤 날에는 완벽한 1대1 찬스를 놓치는 경우가 있듯, 이러한 플랫포밍 난관에 아무리 익숙하고 숙달되었다 할지라도, 플레이어는 언제나 그것을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스피드러너들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모든 난관들을 완벽하게 수행해야만 기록을 갱신할 수 있을 정도로 최적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고전 게임들과 달리, 비교적 근래의 게임들은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플랜 B와 플랜 C를 통해 그 실수를 감안하고 플레이해야 한다. Doom과 Doom II의 Nightmare가 얼마나 스피드런과 유사한지, 그리고 스피드런이 단순히 게이밍 문화에 그치지 않고 게임이 구조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누구든 Nightmare를 클리어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특히 여전히 Doom과 같이 적 부활 메커니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플랫포밍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점은 플랫포밍의 실패할 확률도 함께 증대시킨다.

  또 관성과 로켓 점프에 대한 이해만 충분하다면, 그것들을 활용하여 게임이 정해놓은 길을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지점이 많다. 이것은 버그성 플레이가 전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관성을 이용한 점프와 로켓 점프는 명백히 id가 의도적으로 자유롭게 활용될 수 있도록 넣어둔 도구이다. 이것들을 활용하여 특정 난관을 건너뛰거나 하는 것도 따라서 버그성 플레이가 전혀 아니다. 스피드런에서 활용되는 여러 버그성 플레이는 바로 그 상황에서만 사용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관성과 로켓 점프를 이용한 건너뛰기는 플레이어가 게임 내내 각종 난관들에 각양각색으로 활용해온 것이기 때문에, 문제 풀이의 통일성도 전혀 해치지 않으며, 문제 풀이에 대한 추론 또한 철저히 합리적인 선에서 이루어진다.

  또 여러 지점을 반복해서 오가야 하는 퍼즐들도 다수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맵 17의 마지막 구간은 중앙의 허브 공간을 중심으로 좁은 갈랫길들을 반복적으로 오갈 때마다 새로운 길이 열린다. 관성을 최대한 유지하여 빠르게 길을 뚫지 않으면 중앙의 허브 공간에서 Arachnotron이 부활하기 때문에 관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미 Doom의 에피소드 3 Mt. Erebus 레벨에서 로켓 점프라는 플랫포밍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비밀을 선보인 바 있었던 샌디 피터슨은, 후속작에선 그것을 아예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게임 디자인의 중추로 삼았다. Doom II엔 이와 같은 플랫포밍 난관들이 거의 매 미션에 최소 한두 개씩은 반드시 존재하며, 지형을 통해 운신에 제약을 두는 경우는 그보다 더 많다. 그렇기에 Doom이 적들의 투사체 공격을 피하거나 빠르게 특정 난관을 통과하는 데에만 관성의 활용을 요했다면, Doom II는 이제 그야말로 모든 모험과 플랫포밍에도 마찬가지로 관성의 깊이 있는 활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Doom에선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Action과 Adventure가 융합된 Doom II는 진정한 Action-adventure로 거듭났고, 드디어 PC 게임의 열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형식의 진보를 이루어내었다.

3. Non-linear Chaos

  점프키는 없지만 플랫포밍뿐만 아니라 퍼즐과 게임 지행, 비밀 발견, 모험 등이 모두 관성의 활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으로 인해 Doom II는 2D Super Mario를 3D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마저 준다. 물론 Doom II에는 오롯이 플랫포밍만이 있지는 않다. 플랫폼에서 플랫폼으로의 모험이 Doom II란 작품에 Action으로의 강력한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Action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Doom II의 Action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명백히 슈팅이다. 관성과 점프는 플레이어가 플랫폼과 상호작용하는 단방향적인 상호작용 수단이라면, 슈팅은 플레이어와 적이 서로, 양방향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수단이다. 즉 적어도 움직이는 플랫폼이나 적을 밟고 점프해야 하는 난관이 없거나 매우 적은 Doom II에서만큼은 슈팅이 점프/관성의 활용보다 동적이다.

  또 Doom 비평에서 밝힌 바와 같이 Doom II의 슈팅 또한 단순히 적을 죽이는 것 이상으로 길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이 점이 Doom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적들이 계속하여 부활하기에 최단 경로를 설정하여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빠르게 처치하며 나아가야 하는 필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Doom II에선 샌드박스 레벨들의 추가 및 개선으로 인해, 길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슈팅이 단순히 최단 경로를 설정해야 하는 필요성만을 부여하는 것 이상의 핵심 요소로 발전하였다.

  앞선 글에서 Doom의 에피소드 3에도 샌드박스 레벨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그것들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했다. 샌디 피터슨의 레벨 디자인 능력이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함께 언급하며. Doom II에서 샌디 피터슨은 그러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샌드박스 레벨의 구조적 특징은, 통로를 통해서만 한 방에서 다음 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고전적인 레벨과 달리, 넓은 오픈 필드에 독립적으로 배치된 각각의 방들에 자유롭게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면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할 공산이 큰데, 플레이어의 진행 경로가 크게 제한되어 있어 그 진행 경로에 맞추어 적들과 함정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고전적인 레벨과 달리, 샌드박스 레벨은 플레이어의 이동과 각각의 방에 대한 접근이 너무나도 자유로워 고전적인 레벨과 같은 잘 계산된 난관들을 선보이기가 매우 어렵다. Doom의 샌드박스 레벨들 또한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적들로부터 도망치거나 특정 함정들을 피해서 지나가기가 너무나도 쉬웠던 탓에 게임 진행이 지나치게 수월했다.

  이러한 단점마저 Doom II에선 해결되었다. 물론 단순히 진행 경로 자체에 제한을 두는 것으로도 해결 가능한 문제이지만, 그러한 설계는 샌드박스 레벨의 특징을 완전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샌디 피터슨은 그냥 플레이어가 선택 가능한 모든 진행 경로에 함정과 적들, 그리고 그들을 발동시키는 트리거를 배치한 것이다. 즉 이것은 <The Legend of Zelda: Breath of the Wild>의 오픈월드 디자인과 상당히 유사한 레벨 디자인이다. 다만 Breath of the Wild는 플레이어의 흥미를 이끌 만한 요소들을 모든 진행 경로에 배치해두고, 각각의 흥미 요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그 자체를 스태미너의 제약을 통해 난관으로서 디자인한 것이라면, Doom II는 단순히 특정 구간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함정이나 적들과 같은 리스크, 또는 난관이 발동하여 플레이어를 덮치도록 한 것이다. 때문에 이동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난관은 아니지만 이동을 통해 발동된 적들이 오픈 필드로 쏟아져 들어와 변수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한다.
  


  이를 위해 적병에게 시야의 개념이 추가되었단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적들의 시야 바깥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즉 슈팅하지 않은 채) 활동하면 적들은 가만히 있는다. 그렇기에 이것은 플레이어가 특정한 진행 경로를 선택할 때에만 적들이 플레이어를 발견하고 활동하도록 설계한 것이며, 오픈 필드에 배치된 적들이 처음부터 플레이어에게로 무작정 달려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사실 적병의 시야는 Doom II와 같은 슈터보다는 스텔스 게임에 더 어울리는 시스템이다. 그러한 시야의 저편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스텔스라는 형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Doom II의 시야 개념은 스텔스 게임이 아닌 Wolfenstein 3D에서 계승해온 것인데, Wolfenstein 시리즈가 원래는 스텔스 시리즈였고 Wolfenstein 3D도 몇몇 구간에서는 적병의 시야를 활용한 스텔스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흥미로운 변형이다. 스텔스에서 경기자가 활용 가능한 도구로 등장하던 시야가, Doom II에선 플레이어의 다양한 진행 경로에 제각각 합당한 리스크와 리워드를 부과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니 말이다.



  이처럼 플레이어의 모든 진행 가능한 경로에 적들과 함정이 배치되었기에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Doom에 비해 자연히 한 맵에 등장 가능한 적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이 가져오는 중요한 장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처럼 플레이어의 이동에 따라 적들이 계속하여 오픈 필드 안으로 추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액션 게임에 등장하는 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변수이다. 즉 적이 많다는 것은 곧 변수가 많음을 뜻한다. 그 무수한 변수들이 각각의 인공지능을 가지고 플레이어를 사방에서 압박해오거나 플레이어가 나아가야할 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해보자.

  특히 샌드박스 레벨들은 플레이어의 이동은 자유롭지만 키 카드나 눌러야 하는 버튼과 같이 플레이어가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적들의 시야 안쪽이나 함정을 발동시키는 트리거를 전혀 지나지 않고 레벨을 깨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어느 경로로 향하든 언제나 특정 트리거가 발동하여 적들이 벽 뒤에서 쏟아져 나오고, 어느 위치에 있든 간 언제나 적들이 오픈 필드를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며 플레이어를 쫓아오거나 플레이어를 향해 슈팅한다. 플레이어는 샌드박스 레벨의 어느 지점에 있든 간 시종일관 적들에게 공격받고 가로막힌다. 오롯이 슈팅을 통해서만 던전이 통일되었던 Doom의 에피소드 1과 달리,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적들의 슈팅과 이동을 통해서도 던전이 유기적으로 엮이는 것이다.

  이것은 정돈된 또는 치밀히 계산된 난관이 전혀 아니다. 플레이어의 모든 진행 가능한 경로마다 적들과 함정을 배치하는 것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로 인해 오픈 필드 안으로 적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와 내전을 벌이고 플레이어를 자유롭게 쫓아오거나 플레이어에게 슈팅하며 형성하는 난관은 계산으로 통제 가능하지 않다. 고작 하나의 구역 안에서만 이동 가능했던 적들이, 통로가 아예 없는 오픈 필드 위에선 완전히 자유롭게 이동하고 슈팅하기 때문에, 그것의 결괏값은 게임을 디자인한 샌디 피터슨조차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계산으로 짜일 수 있는 난관이 아니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은 변수들을 한꺼번에 등장시켜서, 완전히 정신없고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오롯이 적들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필드이자 던전 그 자체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즉 샌디 피터슨이 던전을 디자인한 게 아니라, 샌디 피터슨이 각각의 요지마다 배치해둔 적들이 오픈 필드 안으로 다 함께 뛰어들어 즉흥적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던전을 디자인하는 것에 가깝다. 적들은 아무렇게나 배치된 채로 아무렇게나 플레이어를 향해 슈팅하고 또 아무렇게나 서로와 내전을 벌인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한 방에서 다음 방으로 넘어갈 필요는 전혀 없으면서도, 적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서 형성해놓은 던전을 슈팅으로 직접 길을 개척하며 나아가도록 강요받는다. 고전적인 레벨이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정해진 난관들을 등장시킨다면,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우거진 정글 안을 플레이어가 직접 칼을 들고 나뭇가지나 넝쿨 등을 헤쳐 가며 앞으로 진행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적들의 규칙적인 즉흥 연주Improvisation이다. 규칙에 갇힌 적들의 규칙적인 활동이 한데 복잡하게 어우러져 일견 탈규칙적인, 혹은 혼돈스러운 연주를 펼치는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일견 탈규칙적으로 보일 뿐 실제로 규칙과 구조에서 벗어난 난관은 아니지만, 이러한 디자인은 상당히 우아하면서도 진보되어 있다. DRPG에서의 던전은 결국 정적이다.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에 따라 그 구조가 일부 변화하는 경우는 있지만, 전체적인 틀과 퍼즐의 해답, 문제 풀이 방식 자체는 고정적이다. 거의 언제나 상호작용이 플레이어에서 던전으로, 일방통행으로만 이루어진다. 반면 Doom II의 던전들은 동적이다. 이것은 퍼즐도 함정도 전혀 없이 통로에 적들만 배치되어 있는 매우 수준 낮은 JRPG식 던전이 절대 아니다. 그 퍼즐과 함정과 통로와 방해물이 모두 적들로 이루어진 던전이며, 그렇기에 던전이 슈팅과 이동을 통해 플레이어와 끊임없이 양방향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Doom에서도 슈팅은 길을 개척하는 도구였다. Nightmare 난이도의 특성 상 최대한 빠르게 게임을 진행해야 하기에 슈팅을 통해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처리하며 나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플레이어는 정해진 통로를 따라서 나아가야 했다. 반면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에선 오픈 필드 안에 한데 어우러진 적들이 곧 통로이자 벽이다. 이렇게 형성된 벽들을 플레이어가 슈팅으로 허물면서 직접 통로를 만들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플레이어의 능동성이 보다 존중받는다. 적들이 곧 지형이자 던전 그 자체이므로, 그 적들과 상호작용 가능한 유일한 수단인 슈팅의 중요성이 훨씬 부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드넓은 오픈 필드에 적들만 왕창 때려 박는다고 그것이 가능한 게 아니다. 어쨌거나 가장 기본 바탕, 즉 지형지물의 적절한 배치와 설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즉 샌드박스 레벨들의 첫 번째 장점은 결국 플레이어의 비선형적인 게임 진행과 능동적인 문제 풀이를 그 무엇보다도 존중하고 보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두 번째 장점과도 연관이 크다. 플레이어의 모든 진행 경로에 적들과 함정 트리거가 배치되어 있다함은, 결국 플레이어의 모든 이동에 리스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샌드박스 레벨은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의 이동이 매우 자유롭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각각의 구역을 오가는 것은 각 구역들의 적들을 샌드박스 레벨의 중앙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낳는다. 즉 플레이어가 더 많은 구역들을 거쳐 갈수록 더 많은 적들이 중앙으로 쏟아져 나와 플레이어를 유무형의 방식으로 압박한다. 적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애초에 적들이 계속 부활하고 또 탄약의 제약도 있어 아예 불가능하기에, 동선을 최적화하는 것이 문제 풀이에 가장 중요하다.

  각각의 방들이 오픈 필드에 언제나 접근 가능하게 열린 채 배치되어 있고, 이들 중 플레이어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Nightmare에서 정말로 필수 구간만 딱딱 정확하게 거치며 게임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탄약과 체력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력과 탄약, 혹은 무적 아이템 등의 보상을 제공하는 방들을 중 어느 곳에 거칠 것인가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처럼 게임 진행 동선 자체가 철저히 플레이어의 임의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같은 난관이더라도 사람마다 깨는 방식이 상이하다. 가령 BigMacDavis라는 유튜버는 맵 15를 깰 때 먼저 무적 아이템을 획득하고 텔레포트 발판을 밟아서 Barron of Hell을 손쉽게 처리하는 동선을 짜서 플레이했다. 사실 레벨의 구조를 생각했을 때 이것이 아마 샌디 피터슨이 의도했던 동선일 것이다. 반면 나는 Barron of Hell은 BFG로 처리한 후 무적 아이템은 맨 마지막 구간을 위해 아껴두었다. 또 다른 사람은 무적 아이템을 또 다른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어쩌면 나조차 이후 다시 플레이할 시 또 다르게 무적 아이템을 쓸지도 모른다. 이처럼 플레이어가 선택 가능한 동선이 다양하고, 각각의 동선이 모두 서로와는 조금씩 다른 리스크와 플레이를 제공하기에 플레이어가 굉장히 능동적으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

  이러한 비선형적이고 능동적인 게임 진행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선택들 모두에 그에 합당한 리스크가 부과된다는 것이다. 어떤 동선을 선택하든 간에, 그 동선대로 제대로 게임을 풀이하려면 수많은 적들과 플랫포밍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액션 수행 능력이 반드시 요구되며, 또 적들로 형성된 던전은 그 자체로 동적인 변수이기 때문에 언제 어떤 사고가 생길지 모르고, 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언제나 플랜 B, 플랜 C 등을 마련해놔야 한다. 즉 달성해야 하는 고정적인 오브젝티브 외에도, 게임 플레이와 변수에 따라 플레이어가 임의로 설정하게 되는 추가적인 오브젝티브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렇게 모든 선택에 반드시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선택이 의미가 있음을 뜻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진행하더라도 깨지는 난관도 물론 자유롭고 ‘비선형적’이다. 그런데 그것을 게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냥 가지고 놀기 좋은 오락에 불과하다. 비선형성은 그 자체로는 절대 우수하지 않다. 그러한 모든 비선형적인 진행에 합당한 리스크가 존재해야 한다. 아무런 리스크 없는 자유는 그저 게으른 디자인일 뿐이며, 오락과 게임의 차이는 결국 여기서 기인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유도라는 것 또한 결국엔 각각의 모든 ‘자유’에 합당한 리스크가 부과되어야만 의미 있는 디자인이다. 모든 동선에 제각각의 리스크가 부여된다는 것이야말로 단순하고 저질스러운 ‘오락’을 ‘게임’으로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는 작업이며,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매우 가치가 높고 의미 있는 비선형성을 띈다.

  이처럼 던전 탐색과 이동, 게임 진행 등의 모든 요소가 비선형적인 액션으로 수렴하되 그 각각의 요소에 대해서도 모두 깊이 있고 도전적인 난관을 제시한다는 것은 현대의 기준에서 평가하더라도 감히 범접키 어려운 강력한 통일성을 지녔다. 이렇게 통일된 액션만으로 비선형적인 게임 진행이 이루어지도록 한 디자인을 통해, 플레이어가 액션을 수행하는 그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 어떤 고유한 서사성을 띄게 된다. Doom과 Doom II에는 스토리가 없다. 배경 설정에 대한 텍스트로의 설명밖에 없다. 이것은 컷신을 구현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심지어 패미컴 게임인 Ninja Gaiden 시리즈에도 있던 것이 컷신이며, 당대의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들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의 컷신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id는 스토리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롯이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액션을 통해서만 비선형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게임을 선보임으로서, 플레이어의 그러한 모든 비선형적인 선택들이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서사가 되도록 했다. <The Last of Us Part II>와 같이 게임에 스토리를 욱여넣고자 기를 쓰지만 실패한 게임이나, <Red Dead Redemption II>처럼 스토리를 위해 게임을 포기한 ‘게임’보다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으면서도 철저히 게임다운 서사를 id software가 구축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선형적인 혼돈 또는 광기로 구현되는 ‘플레이어 고유의 서사’라는 형식적 특징은 <Ultima IV>와 같은 가장 높은 수준의 CRPG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id Software가 플레이어 고유의 서사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선형적으로 접근 가능한 오브젝티브들을 오픈 필드에 흩뿌려놓고 각각의 선택들에 모두 리스크를 부과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모든 플레이에 서사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4. Symbol of the Era  

  이러한 샌드박스 레벨이 정상적으로 플레이어를 압박할 수 있는 데에는 물론 적들의 수 자체가 증가하고, 함정과 지형지물의 배치가 훨씬 치밀해졌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각각의 전투 시퀀스 디자인 자체가 전작에 비해 훨씬 우수해졌기 때문이다. 던전 탐색 자체는 Doom의 에피소드 2 던전들에 비해 단조롭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DRPG의 열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Doom II의 던전들은 DRPG가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더 다채롭고 도전적인 액션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액션이란 곧 변수에 대한 실시간 입력으로의 극복이며, Doom II는 플레이어의 운신과 시야를 적절히 방해하는 고정된 지형,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지형, z축, 그리고 적들의 조합과 배치 등 그야말로 Doom의 시스템이 가진 모든 부분을 활용하여 다양한 난관들을 선보인다. 그렇기에 전작과 완벽히 동일한 시스템을 갖고도 전작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우수한 던전들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굳이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보자면, 맵 4는 위아래로 움직이며 열렸다 닫혔다 하는 창을 통해 그 너머의 적들을 공격하거나 확인하는 것을 까다롭게 하였고, 맵 6의 첫 난관은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Spider Mastermind를 배치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Crusher(맵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작동하든가, 아니면 Imp와의 내분을 유도하든가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맵 6의 두 번째 구간에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며 사방과 계단 정중앙의 적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도록 했고, 마지막 구간에선 해자를 판 후 Spectre들을 배치하여 해자 너머의 적들을 공격하기 어렵게 했다. 단순히 해자에 적들을 배치한 게 무슨 영향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Doom의 시스템상에서 플레이어의 조준은 z축을 오갈 수 없다. 그렇기에 z축 상의 물체를 공격할 경우 자동 조준 보정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자의 Spectre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슈팅하고자 하더라도 자꾸만 자동 조준 보정을 통해 Spectre에게 슈팅되며, 로켓 런처라도 사용할 경우 바로 발 밑의 지형과 부딪힌 로켓의 방사 데미지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비단 이 구간뿐만 아니라 맵 13이나 맵 29에서도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위아래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볼 수 없다는 점을 활용해 시야 바깥에 적들을 배치하여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즉 심지어 자동 조준 보정과 z축의 부재마저도 레벨 디자인을 통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게임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명백히 Doom의 3D 공간은 복층 구조가 전혀 없는 사실상의 2.5D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옳으나, Doom II는 심지어 바로 그러한 점마저도 게임 디자인의 일부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기능한다. Doom의 시스템이 가진 장단점 말고도 새로 추가된 적들의 매커니즘을 활용한 독특한 난관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맵 17이 그렇다. 맵 17엔 정중앙의 좁은 감옥에 Arch-vile을 배치하고 그 주변을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도록 요구한다. 단순히 달려서 지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Arch-vile의 공격을 받아 아래의 용암 지대로 떨어지도록 한 설계이다. 이에 대한 대처법은 매우 독특하다. Archivile의 시야 내에 있는 플레이어를 무조건 공격한다는 점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좁은 감옥의 네 기둥을 Arch-vile과의 사이에 두어 시야에서 벗어나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바로 그 해답이다.


  이것을 오히려 적의 입장에서 활용한 난관으로는 맵 12의 마지막 구간이 있다. 대략 10이 넘는 수의 Caco Demon을 각각 독립된 1x1 플랫폼에 배치하고, 각각의 플랫폼들이 서로 다른 박자로 위 아래로 움직이도록 하였다. 즉 아래로 너무 내려가거나 위로 너무 올라간 Caco Demon은 지형지물에 가려져 플레이어의 시야 저편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단순히 BFG를 한 방 쏘는 것만으로 모든 Caco Demon을 단번에 처리할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심지어 각각의 플랫폼마다 배치된 스위치들을 모두 눌러야만 exit으로 진행이 가능하고, 또 Caco Demon을 죽인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부활하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고 넘어서기 어려운 난관으로 기능한다.






  이와 같이 독특한 전투 시퀀스들이 모든 맵에 몇 개씩은 존재하고,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도 전부 차별화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난관 자체가 정적인 퍼즐이나 던전의 구조가 아닌, 동적인 변수, 즉 적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매번 다르고 언제나 인상적이면서도 도전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여기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Doom II의 시스템 자체는 Doom과 완벽히 동일하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시스템 자체가 잘 갖추어졌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게 완벽히 동일한 시스템을 가지고도 시스템의 모든 부분을 독특하게 활용하고 다양한 레벨들을 디자인함으로써 전작과 차원이 다른 경기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Doom II의 샌드박스 레벨들이 가진 가치와 장점이 너무나도 개성적이고 드높기에 그 외의 고전적인 레벨들은 소홀히 다루긴 했으나, 그것이 고전적인 레벨들에 별다른 가치가 없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그 반대에 가깝다. Doom II는 샌드박스 레벨들은 물론이고 게임 내에 포함된 거의 모든 레벨들이 Doom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3D 액션 게임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Doom II의 레벨 디자인을 뛰어넘는 액션 게임을 찾기가 훨씬 어렵다.

  혹자는 말한다. Doom II마저 2D 게임에서 3D 게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이며, 따라서 게임이 완전한 3D 공간을 구현할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평가하면 그렇게 높은 가치를 지니진 않았다고 말이다. 확실히 본 작품은 3D 게임이 아니다. 다만 3D 게임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복층적인 레벨 디자인은커녕 고개를 위나 아래로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2D 게임이라 할 수도 없다. 분명 1인칭 시점에서 3D 공간을 모험한다는 3D 게임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Doom II야말로 2D도 3D도 아닌 2.5D 게임이며, 진정한 3D FPS 게임은 Quake에 와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주장할 수도 있다.

  일리는 있다. 그러나 오히려, 2D에서 3D로 게임이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진보하던 그 혼란스러운 시대에 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에, Doom II는 2D라는 평면 공간이 지닐 수 있는 광기와 3D라는 입체 공간이 지닐 수 있는 1인칭 시점의 제한이라는 두 특성을 모두 겸비할 수 있었으며, 각각의 것들을 레벨 디자인과 적 디자인을 통해 완벽하게 게임에 녹여들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Doom II는, 게임이 완전히 2D와 3D로 분리된 지금에 와서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이다. 현대의 개발사들이 2.5D 게임이라 홍보하는 것들은 모두 그래픽만 3D일 뿐 3D 게임의 형식적 특징들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기에 그냥 2D 게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기에 Doom II는 아직까지는 2.5D 형식의 완성형이자 이상향이며, 한 시대의 상징이다. 평면과 입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바로 그 시대에, 평면과 입체의 가치를 모두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2.5D는 결국 2D에서 3D로 넘어갈 때 잠시 동안 나타났다 바로 사라져버린 생명력이 빈곤했던 형식이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 id Software는 영원히 게임사에 남을 금자탑을 쌓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이후 게임이 구조적으로 너무나 복잡해지고 발전하여 대중과 멀어지고, 그 과정에서 구조의 해체와 같은 움직임이 일어 2.5D 게임이 주류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어떤 천재적인 개발자가 나타나 2.5D 게임만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혁명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의 발전도, 우수한 창작자의 탄생도 모두 정체된 지금의 게임계가 그러한 작품을 탄생시키기란 아직 요원해 보인다. 다만 id Software만이 Doom Eternal과 같은 작품을 통해 Doom II의 불꽃을 계승할 뿐이다.

★★★★★
5/5
-Lee Yin
Next; Qu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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