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Form


  장르Genres와 형식Form은 다르다. 장르는 컨슈머와 시장의 상업적 합의와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 단순히 장르명을 보는 것으로 게임의 성격을 대강 유추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컨슈머들의 소비 생활 영위에 큰 도움이 된다. 소비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장르의 정의는 게임들의 구조적 특징이 아닌 대부분의 컨슈머들이 특정 부류의 게임들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인식을 따른다. 가령 <Resident Evil(바이오하자드)>과 스텔스 게임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The Last of Us(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분명 서바이벌 호러/스텔스로 불려야 마땅한 구조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상업적 합의에 의해 서바이벌 호러나 스텔스가 아닌 액션 어드벤처 장르로 판매되며, 해당 타이틀을 서바이벌 호러/스텔스 게임으로 지칭하는 사람들은 그 팬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처럼 장르에는 아무런 일관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르의 정의와 분류의 기준이 컨슈머와 시장의 인식 변화에 있고, 그 인식은 작품의 사소한 부분을 확대해석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구조적 특징들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형식은 컨슈머의 편의를 위해서도, 상업적 합의에 의해서도 아닌 철저히 게임들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분류에 따라서 정의된다. 가령 컨슈머들에게 있어 RPG(Role-Playing Game)란 숫자를 수집하는 레벨링이 가능하며 스토리가 중요한 역할극이기에, <The Elder Scrolls V: Skyrim(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이나 <The Witcher 3(더 위처 3)>는 RPG 중에서도 서양 정통 RPG 장르의 게임으로 인식된다. 이것이 장르로서의 RPG이다. 그러나 형식으로서의 RPG는 다르다. <Wizardry(위저드리)>와 <Ultima(울티마)>가 제시한 형식으로서의 RPG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색을 통해 단서와 도구를 수집하여 퍼즐 등의 제시된 문제들을 비선형적으로 해결하는 어드벤처Adventure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어드벤처와는 달리 TRPG(Tabletop Role-Playing Game)의 영향을 받아 파티와 파티원들의 성장을 추가적인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제시한다.


Zork 맵의 일부.
탐색을 통해 알아낸 정보로 맵을 직접 그려가며 플레이해야 한다.


Ultima IV 저널의 일부.
수집한 단서와 단어로 퍼즐의 정답을 추론하고 다음 행선지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Wizardry에 등장하는 텔레포트 엘리베이터.
어느 버튼이 어느 플로어로 이어지는가는 시행착오를 통해 직접 알아내어야 한다.
탐색과 탐구의 과정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영향만으로 RPG가 TRPG의 하위호환격인 역할극이라 이해해선 안 된다. RPG의 파티원들은 그 하나하나가 역할극의 주체가 아닌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수단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파티원과 그들의 성장을 어드벤처의 다른 숱한 도구들과 완전히 동일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RPG와 어드벤처는 사실 같은 대분류로 묶을 수 있는 형식이며, 실제로 여명기의 RPG는 RPG-Adventure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긴 해도, 파티원과 성장은 기존의 어드벤처 게임들이 제시했던 도구들과는 다소 다른 성격을 지닌다. 어드벤처의 도구는 그 용도가 고정적이다. 정해진 용도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Zork(조크)>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단어 입력을 통해 지정해줘야 하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가 곧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이자 해답이다. 퍼즐을 깨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퍼즐에’ 대한 답인지, 또 ‘어떤 단어로’ 그것을 사용해야 퍼즐을 깰 수 있는지 또한 비선형적으로 모험하고 탐구하며 알아내어야 한다.

  <Riven(리븐)>의 퍼즐들 또한 비선형적인 문제 해결 경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두 게임에서 하나의 단서/도구는 정해진 퍼즐들에 대한 해답으로만 작동할 뿐 고정된 용도의 범주를 넘어선 상황에선 아무 효과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것은 NPC들과 주관식 문답을 하며 단어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의 용도를 유추해야 하는 <Ultima IV: Quest of the Avatar>나, 스태추와 열쇠를 게임 진행을 위한 도구로 모아야 하는 Wizardry 또한 마찬가지로 공유하는 특성이다.

  반면 파티원과 그들의 성장은 상당히 유연하게 쓰일 수 있는 도구이다. 예를 들어 Wizardry는 플로어Floor를 진행할 때마다 적들의 레벨이 더 높아지고 수면 마법이나 광역 공격 마법과 같이 보다 상대하기 난해한 마법들을 구사하기에, 플로어마다 사실상의 레벨 요구치가 존재한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레벨 그라인딩을 강제한다고 볼 수 있지만, 부족한 레벨을 장비와 전략으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파티원의 구성도 연구를 통해 더 ‘나은’ 조합을 짤 수 있으며 실제로 게임 초반에 요구되는 스쿼드와 후반에 요구되는 스쿼드가 상이할 정도로 어느 정도 가장 정답에 가까운 스쿼드가 정해져 있다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러한 조합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조합이나 전략, 장비로 보완할 여지가 조금이나마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어드벤처 게임의 도구란 열쇠이다. 정해진 문만 열 수 있다. 반면 파티원과 성장은 열쇠의 재료이다. 반드시 열쇠를 만들어야만 문을 열 수 있는 건 같지만, 각각을 어떻게, 얼마만큼 사용하여 열쇠를 만들 것인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해결 수단의 유연함은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좀 더 존중해준다. 어드벤처 게임에선 퍼즐의 답을 제시하면 그것이 곧 난관(= 퍼즐)의 해결로 이어지지만, RPG에선 그 답을 들고 있다 하더라도 플레이어의 전투 수행 능력이 떨어지면 난관(= 전투, 함정, 혹은 던전 그 자체)을 넘어서지 못 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 실패가 조합의 문제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의 문제인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요구한다. 반대로 요구치에 미달하는 레벨의 파티원들을 들고 플레이하더라도 파티원의 조합을 우수하게 구성하거나 적절한 전략을 짜서 지능적으로 플레이하거나 제대로 된 장비와 아이템을 갖춘 경우 난관을 넘어설 수 있다.


<Wizardry II: The Knight of Diamonds>의 Evil 성향 파티.
성향, 직업, 배운 마법의 종류, 장비 등 파티의 각 부분을 상당히 세세하게 조정하여 조합을 짜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결 수단의 유연함’이란 철학은 이후 <Ultima Underworld(울티마 언더월드)>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여 완전한 3D 공간과 만나 소위 ‘Immersive sim’이라 불리는 부류의 RPG를 탄생시켰다. Ultima Underworld나 <Thief: The Dark Project(씨프)>, <System Shock(시스템 쇼크)>에 파티원은 존재치 않는다. 그러나 파티원보다도 더 유연하게 사용 가능한 갖가지 도구들을 제시하며, 이들의 이용이 언제나 자원 관리와 맞닿아 있기에 잘못된 해답을 제시했을 때의 리스크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해결 수단의 유연함이란 요소는 RPG와 어드벤처를 가르는 중요한 척도이다. (시에라/루카스 이래의 그래픽 어드벤처와 달리 어드벤처 형식에 오직 정해진 수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Zork나 <The Legend of Zelda(젤다의 전설)>과 같은 작품들은 퍼즐의 해답이 비록 정해져 있을지언정 그 해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철저히 존중한다. 지역의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단서와 도구를 모아, 각각이 마찬가지로 곳곳에 산재한 퍼즐들 중 어떤 것의 해답일지를 추론해내어야 한다. 해결 수단의 유연함과 문제 해결 과정의 비선형성은 다른 논제이다.)

  그래서 파티와 레벨링으로 말미암은 ‘해결 수단의 유연함’이란 특성을 제외하면 RPG란 형식은 어드벤처와 완전히 동일하다. 또한 스토리의 경우, 역할극과 마찬가지로, 비디오 게임의 다른 모든 형식이 그렇듯 RPG에겐 전혀 필요 없는 요소이다. RPG와 어드벤처는 모두 비선형적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형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며, Skyrim과 The Witcher 3는 이러한 형식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작품들이기에 정통 RPG의 ‘형식’으로는 분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두 게임을 서양 정통 RPG ‘장르’로 분류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다. 장르란 것은 전술했듯 그저 소비자들의 비일관적인 인식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상업 도우미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컨슈머가 Skyrim을 서양 정통 RPG라 부르고 시장에서 그렇게 팔린다면 Skyrim은 그냥 서양 정통 RPG 장르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 대고 Skyrim은 서양 정통 RPG의 ‘형식’이 아니라 말하는 것엔 아무 의미가 없다. 애초에 서로 논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컨슈머들과의 무의미한 논쟁만을 유발할 뿐이다.

  장르와 형식의 차이로 인해 게임의 숱한 형식들을 두고 그것을 장르로 받아들이는 컨슈머들과, 형식에 대해 나름 제대로 이해했으나 그것을 형식이 아닌 장르로 잘못 지칭하는 게이머들 간의 소모성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컨슈머들에게 있어 어드벤처란 ‘장르’는 선택지를 체크하고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높은 부류의 게임들인 반면, 어드벤처의 선조들을 직접 플레이해본 게이머들은 그들의 그러한 ‘형식’에 대한 오해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생산적인 논쟁을 멈추기 위해선 형식과 장르를 엄격히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합의에 이를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리뷰가 아닌 게임 비평에 있어 장르를 논할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아무런 일관된 기준 없이 컨슈머들의 인식에 따라 변화하는 장르를 기준으로 게임에 대한 평가를 감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형식의 구분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형식의 구조적 발전을 선보인 혁신적인 게임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진보한다. 그리고 매우 드물게, 어떤 게임들은 기존의 형식들로는 분류할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을 완성하기도 한다. 형식을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는 게임이야말로 게임의 진보를 주도하는 작품들이기에, 게임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이 통시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를 평가하는 게임 비평을 통한 이러한 작품들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은 게임에서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게임에 장르와는 구분되는 형식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가 곧 모든 것인 게임 스터디야말로 그것의 형식을 정확히 구분짓고 분류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각각의 게임들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연구가 제대로 진행된 적 없기에 형식에 대한 논의 또한 자연스럽게 진척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id Software(이드 소프트웨어)>만큼 연구 가치가 높은 개발사社는 드물다. id의 개발사史가 곧 FPS(First-Person Shooter)의 탄생사이자 발전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컨슈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FPS란 ‘장르’란 단순히 일인칭으로 무언가를 쏘는 모든 게임이다. 여기서 일인칭으로 무언가를 쏘는 특징만 갖추었는가 아니면 그것 외의 다른 요소들도 중요한가에 따라 설왕설래하는 수준이지, 대체적으로 일인칭으로 쏘는 게임들은 다 FPS 장르로 묶인다. 그래서 최초의 FPS를 논할 때면 1974년의 <Maze War>나 <Spasim>이 거론된다. 상세히 후술하겠지만, <Call of Duty(콜 오브 듀티)>를 위시로 한 대부분의 현대 FPS는 <Half-Life(하프 라이프)>의 열화, Half-Life는 <Doom(둠)>, 더 정확히 말해 <Quake II(퀘이크 2)> 싱글 플레이어 캠페인의 열화이고 Doom은 Maze War나 Spasim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다른 계보를 가진 게임이며 또한 FPS란 명칭부터가 본래 ‘둠 클론’의 대체명이었기에 장르로서의 FPS의 시초도 명백히 Doom이다.


Doom을 기점으로 'doom clone'이 쓰이는 일이 급격히 증가했고, 1995년 즈음부터 쓰이기 시작한 FPS가 97년 중반엔 doom clone을 완전히 대체하기 시작했음을 증명하는 그래프. Doom 이전엔 FPS란 단어는 쓰이지 않았거나 다른 뜻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지금의 FPS 장르가 가진 정의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Maze War를 얼마든지 최초의 FPS 장르의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장르에 대한 논쟁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러나 형식으로서의 FPS는 명백히 id가 최초로 제시했다. id가 최초로 완성시킨 FPS란 형식은, 기존의 그 어떠한 형식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다시 말해 거기엔 단순히 1인칭으로 쏘는 것 이상의 특징들이 있었으며, 1인칭으로 쏘는 게임은 이전에도 수도 없이 있어왔으나 그 중에 FPS는 없었다.

1. 3D Trilogy

1-1. 공간에 대한 철학


  1991년부터 1992년까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id는 세 개의 3D 게임들을 제작했다. 각각 <Hovertank 3D(호버탱크 3D)>, <Catacomb 3D(카타콤 3D)>, 그리고 <Wolfenstein 3D(울펜슈타인 3D)>이다. 이들에 대한 비평을 시작하기에 앞서 RPG와 어드벤처의 형식적 특징을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FPS의 형식 자체가 RPG, 그중에서도 Wizardry 계열의 DRPG(Dungeon Role-Playing Game)를 기반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평적 선언과 같은 누군가의 ‘주장’이 아닌 명백한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레퍼런스들의 제시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id의 첫 3D 게임이라 할 수 있는 Hovertank 3D만 따로 놓고 보면 그러한 사실이 잘 와 닿지 않을 뿐이다.

  Hovertank 3D의 구조는 간단하다. 1인칭 시점에서 던전을 탐색하며 맵에 배치된 여러 개의 아이의 스킨을 쓴 오브젝티브를 획득한 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출구의 역할을 하는 포탈로 향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Alt를 눌러 가속할 수도 있고 Ctrl을 눌러 미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적들에게 대포를 쏠 수도 있다. 이러한 레벨들이 총 20가지가 있고, 20개의 레벨을 모두 클리어하면 게임은 끝난다.



  이것이 구조의 전부이다. 각각의 시스템과 레벨 디자인 역시 너무나 원시적이기에 DRPG의 영향이 잘 느껴지지 않을 만 하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Hovertank 3D의 레벨은 적과 수집 대상과 출구만이 존재하는 매우 원시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최초의 DRPG인 Wizardry의 던전은 여러 단서와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도구를 사방에 흩뿌려 놓고, 그것들을 플레이어가 스스로 위치와 이용법을 알아내어 비선형적으로 게임을 깨나가도록 요구한다. 또 곳곳에 함정과 고정 인카운터를 배치하고 어느 지역에서건 랜덤 인카운터의 압박을 받도록 해 던전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적으로서 플레이어를 대적한다. 그렇기에 비록 함정의 위치와 도구의 이용법, 던전의 레이아웃 등을 모두 익힌 다회차에선 던전이 난관으로서 가지는 가치가 크게 떨어지나, 오히려 그만큼 첫 회차에 어드벤처 계열의 게임들을 제외한 그 어떠한 형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경기를 제시한다.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그 무엇보다도 존중하고, 그 이후로 다시는 그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기에, 이러한 경기에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난관을 극복해내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플레이어 자신이 주인공인 고유한 ‘서사’로 남는다. [1]

  Hovertank 3D의 레벨은 이러한 Wizardry의 던전에서 뼈대만을 남겨둔 수준이다. 함정도 단서도 퍼즐도 도구도 무엇도 없다. 전투마저도 Wizardry보다 깊이가 없다. Wizardry는 플로어를 진행할 때마다 새로이 등장하는 적 종류를 분석한 후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파티 조합을 연구하고 또 던전에 들고 갈 아이템들도 고민해서 구매해야 하는 반면 Hovertank 3D에서 난관으로 등장하는 적들은 그냥 둥둥 떠다니는 과녁에 불과하며 또 퍼즐도 함정도 아무것도 없기에 난관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고민도 연구도 필요치 않다. 정녕 그것을 ‘극복’이라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즉 Hovertank 3D의 레벨은 DRPG의 던전이 가지는 장점들이 거의 다 거세되고 적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라는 가장 기본적인 뼈대만이 남아 있으며, 따라서 첫 회차의 강렬함 같은 것은 없다.


특히 <Wizardry IV: Return of Werdna>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파티원 육성이 불가하고 레벨마다 배치된 Pentagram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갖은 몬스터 종류 중 일부를 선택해 소환하는 식으로 파티를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조합의 짜임새가 더욱 중요하다. 

  이처럼 그저 적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불과한 Hovertank 3D의 던전과 보다 깊이 있는 Wizardry의 던전은 언뜻 보기엔 1인칭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제하면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 1인칭으로 진행된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다. 던전의 구조에 대한 정보 제공이 1인칭 시점의 좁은 화면 안에 들어오는 협소한 공간으로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제 풀이에 앞서 던전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선 맵을 그려내는 ‘공간에 대한 탐색’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것이야말로 DRPG, 더 나아가 어드벤처 형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거기다 Hovertank 3D에는 우수한 DRPG와 마찬가지로 오토맵마저 없어 미지의 공간에 대한 탐색을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능동에 맡긴다. Hovertank 3D의 경기 역시 DRPG처럼 모든 것이 탐색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점은 Hovertank 3D가 공간을 구성하는 철학이 DRPG, 나아가 어드벤처의 철학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철학이 동일하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철학이 동일하지만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은 전혀 주지 않은 작품들 또한 게임사에 분명 존재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철학만 동일한 수준을 넘어서서 DRPG의 직접적인 영향이 더욱 부각된 Catacomb 3D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DRPG의 여러 요소를 그대로 이식해왔기 때문이다. 먼저 Hovertank 3D에는 없지만 그 당시 DRPG의 던전들에는 필수 요소로써 존재했던 단서, 퍼즐, 비밀, 열쇠와 그걸로 열어야 하는 방이 Catacomb 3D에도 모두 존재한다. 여러 종류의 열쇠와 특정 종류의 열쇠로만 개방되는 방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다른 층의 퍼즐과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들이 앞선 층들에 배치되어 있는 등 플레이어의 비선형적인 탐색에 대한 존중도 갖추었다.(물론 층 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게임은 아니나, 애초에 다회차 플레이를 기본 전제로 깔고 플레이하게 되는 스코어링 게임이므로 비선형적인 탐색이 존재한다.) 방마다 적들이 대거 잠입해 있고 특정 위치에 도달하면 사방에서 적들이 플레이어를 둘러싸며 달려오는 등 함정다운 함정 또한 있다. 슈팅으로 가짜 벽을 제거하는 것도 문제 풀이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겉보기에는 다른 사물과 똑같으나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에 따라 변화하는 오브젝티브의 존재 역시 DRPG와 어드벤처의 형식적 특징이다.

  특히 18층인 The Labyrinth는 탐색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이에 대한 힌트를 앞선 층에서 발견할 수도 있기에 마찬가지로 탐색을 통한 문제 풀이를 요구한다. 19층 또한 퍼즐에 대한 단서를 앞선 층에서 수집하지 않았을 경우 진행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퍼즐이 가로막는다. 


19층에서 주변에 보물이 배치되어 있는 포탈로 진입할 시 이전 층으로 순간이동해버린다. 

  이렇게 DRPG가 이미 선보였던 요소들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DRPG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이, 단순히 철학만을 공유하는 정도였던 Hovertank 3D보다도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누구도 여기에 DRPG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년 뒤인 1992년에 발매된 Wolfenstein 3D 역시 Catacomb 3D의 던전 구조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으며 보다 세분화한 스코어링 시스템을 통해 던전 탐색을 더욱 부각시켰다. Wolfenstein 3D는 잔여 시간 1초마다 추가 점수 500점을 제공한다. 또 킬 100%, 비밀 발견 100%, 보물 수집 100%를 달성하면 각각 1만점, 도합 3만점을 제공하며, 죽은 적 한 명마다 또 수집하는 보물 하나마다 추가적으로 점수를 제공한다. 만약 시간 보너스가 줄 수 있는 최대 점수가 킬/비밀 발견/보물 수집의 3만점+a보다 컸다면, Wolfenstein 3D는 최대한 게임을 빠르게 깨야만 하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단순히 매 레벨의 출구만을 찾는 게임 플레이를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플레이해본 바에 따르면 시간 보너스가 줄 수 있는 최대 점수가 100% 던전 탐색을 마쳤을 때 얻을 수 있는 보너스 점수보다 거의 언제나 낮았다. 극소수의 예외만이 있었을 뿐이다. 즉 Wolfenstein 3D는 스코어링 시스템을 통해 던전 탐색을 완벽히 끝마치는 것을 구조적으로 요구하며, 이는 게임의 중점이 대놓고 던전 탐색에 있음을 보여준다.


각 에피소드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비밀 플로어는
일반적으로는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져 있으며
15000점의 보너스 점수를 제공한다.

  그러나 던전에 대한 철학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던전 디자인의 수준 또한 마찬가지로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던전 디자인만으로는 이 3D 트릴로지를 좋게 평가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Wizardry에 비해 갖추지 못 한 것이 많다. 일단 Wolfenstein 3D의 던전은 Catacomb 3D보다는 발전했다. 여전히 격자식 던전이지만 열쇠의 위치와 입구까지 향하는 데 선택할 수 있는 동선이 다양하여 열쇠를 반드시 먹어야만 게임 진행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해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비선형적으로 진행된다. 또 맵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비밀들의 존재는 공간에 대한 탐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어드벤처의 형식을 훌륭히 계승했다. 그러나 Catacomb 3D보다는 나을 뿐, 여전히 DRPG의 고전Classic들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우선 지적할 점은 오토맵이다. Wolfenstein 3D는 오토맵을 제공하지 않아 최고 점수를 기록하기 위해선 사실상 대부분의 맵들의 그림을 직접 그려가며 플레이해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구조의 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의 던전처럼 ‘직접 맵을 그려가며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함정’은 있지만, 플레이어의 방향을 꼬아버리는 방위 함정이나 플레이어를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 시켜버리는 함정(다만 좌표 마법이 없는 Wolfenstein 3D에 이러한 함정을 그대로 가져오긴 어려웠을 것이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마법을 통해서도 시야를 밝힐 수 없는 다크 존, 그리고 일방통행만 가능한 벽 같이, ‘플레이어의 맵 기록 자체를 꼬아버릴 수 있는 함정’들이 Wolfenstein 3D엔 없기 때문에 오토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구조적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 한다.

  맵을 직접 그려가며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이라면 응당 그 직접 맵을 그리는 플레이에 대해서도 넘어서기 어려운 난관을 제시해야 마땅한 것이고 Wizardry는 분명 그러한 게임이었다. 그래서 Wizardry와 같이 오토맵을 갖추지 않은 DRPG는 절대로 오토맵이 존재해선 안 된다. 오토맵의 추가만으로 사라질 장점들이 너무나도 많으며, 오토맵이 있는 Wizardry는 오토맵이 없는 Wizardry의 심각한 열화판이다. 열화판을 넘어서 아예 같은 게임이라고 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Wolfenstein 3D는 그냥 오토맵을 줘버렸더라도 게임의 가치엔 변화가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토맵이 없다는 점은 그냥 맵을 직접 그려야 한다는 귀찮음만을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위 함정을 제하더라도, Wizardry가 가지고 있는 여러 다양한 퍼즐과 그에 대한 해결 수단이 Wolfenstein 3D에선 모두 금열쇠/은열쇠로 통일이 되어버렸으며, 그러한 희생을 통해 Wolfenstein 3D만의 개성적인 퍼즐, 함정, 또는 비밀을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즉 Catacomb 3D나 Wolfenstein 3D나 던전 RPG의 몇몇 도구들을 그대로 가져왔으면서도 진정으로 Wizardry의 던전을 도전적이게 만들었던 핵심적인 난관들은 아예 배제했으며, 그것들을 대체할 두 게임만의 독특한 함정을 따로 추가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Wizardry의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는다.



Wizardry IV 4층, The Maze of Wandering.
일방통행 벽, 끊임없이 위치가 바뀌는 방,
특정 아이템이 없으면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함정 등으로 인해
지도를 그리는 작업의 여정이 극도로 난해하다.


1-2. ...And action


  물론 정말로 작품 전체가 Wizardry의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3D 트릴로지를 단순히 DRPG의 철학을 그대로 가져온 하위호환 작품들로 보는, 말하자면 원리주의 RPG 게이머들의 관점에서나 그렇다는 말이며, 그러한 관점은 완벽히 틀렸다.[2] 던전 디자인만을 따졌을 때는 하위호환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id의 작품들에 오직 DRPG의 영향만 있지는 않다. id는 단순히 복잡한 던전을 짜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냥 DRPG를 만들었을 것이다. 3D 트릴로지 모두에 존재하는 스코어링 시스템부터가 아케이드 게임으로부터 가져온 것이고, 무엇보다도 실시간의 형식을 채택했다는 점은, DRPG의 턴제 형식이 가진 깊이를 포기하고서라도 구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음을 뜻한다.


  이후 작품들로 갈수록 발전한 것은 비단 던전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액션에 있어서도 여러 번의 혁명적인 발전이 있었다. Hovertank 3D와 달리 Catacomb 3D에선 좌우 이동이 가능하며, 적들 또한 빠르게 플레이어에게 다가옴으로써 더 위협적으로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후술하겠지만 Wolfenstein 3D 또한 여러 방면에서 Catacomb 3D의 전투를 발전시켰다. 던전뿐만 아니라 액션 또한 매번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id의 목표가 단순히 DRPG의 공간에 담긴 철학만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에 있었다기보다는, 그 철학으로 구현해낸 공간 안에서 고속 액션으로 게임을 진행해내는 것, 다시 말해 3D 공간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활보하는 적들과 슈팅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고속 액션과 3D 공간의 완전한 결합에도 있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Hovertank 3D와 Catacomb 3D의 이러한 액션마저도 한참 이전의 아케이드 슈팅 게임들과 비교하면 유아기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쏘고 피하는 원초적인 액션만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나 가능한 평가이다. id의 두 작품은 아케이드 슈팅 게임들과 달리 3D 공간과 고속 액션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합은 PC 게임과 콘솔 게임의 직접적인 교류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동안 어드벤처와 RPG로 대표되는 PC 게임들과 액션으로 대표되는 콘솔 게임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Zelda와 Super Mario bros, Metroid 등의 닌텐도 게임들은 거의 모두가 PC 게임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어드벤처의 형식을 갖고 있긴 했으나, 결국 액션을 통해 탐색과 모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액션이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첫 스테이지에서 게임의 상징과 같은 파워업으로 발견 가능한 시크릿에 주목하자.
패미컴Family Computer 시절 Super Mario Bros.는 언제나 어드벤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PC 게임 개발사였던 id는 PC란 기기에서도 콘솔 게임의 고속 액션을 구현하고자 했다. 특히 이후 id의 다른 게임들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Super Mario Bros. 3(슈퍼 마리오 3)>를 PC로 포트하고, 거기에 영향을 받아 <Commander Keen(커맨더 킨)>이라는 탐색 중심의 플랫포머를 제작한 것도 이러한 탐구에 따른 결과물이다. 고속 액션을 위해선 먼저 스크롤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스크롤 속도가 곧 액션의 속도인 것은 아니나 적어도 속도의 한계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Super Mario Bros. 3은 그 당시 패미컴 게임으로서는 가장 빠른 게임 중 하나였고, 그와 같이 빠르게 진행되는 액션 게임이 아직 없었던 PC로 그것을 이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Catacomb 3D 또한 그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원시적이지만 어쨌든 DRPG의 3D 레벨 안을 플레이어가 자유롭고 꽤 빠르게 이동하며 액션을 통해 적들을 쏴 터뜨린다는 융합을 나름 보여주는 데 성공했으며, 새로운 형식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Hovertank 3D를 다시 평가할 수 있다. 앞서 간략히 서술한 바 있듯 Hovertank 3D는 스코어링 시스템을 갖추었다. 스코어링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다회차성을 동반하는데, 그 존재로 인해 게임의 목적이 단순히 엔딩을 보는 게 아닌 최대한 높은 점수를 기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확히 어떠한 플레이를 통해 높은 점수를 기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해야 하고, 그러한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히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해서 플레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최고 난이도 엔딩을 보는 것이 목표인 액션 게임들에 다회차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의 실시간 입력을 최대의 장점으로 삼는 모든 우수한 액션 게임은 다회차성을 필연적으로 띌 수밖에 없다. 다만 스코어링 게임들은 그것이 우수하건 우수하지 않건 다회차 플레이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다회차 플레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하이 스코어를 기록하는 법을 연구해야 하기에, 단순히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과 높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플레이를 요구하며, 따라서 스코어링 게임은 스코어링을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만 한다. 가령 현대 게임들 중 가장 대표적인 스코어링 게임인 <Devil May Cry(데블 메이 크라이)>를 단순히 엔딩을 보는 것을 목표로 플레이한다면 그냥 체력 회복 아이템 매번 쓰면서 사기적인 무브들만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거기다 적들은 <Ninja Gaiden(닌자 가이덴)> 같이 Devil May Cry의 첫 작품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게임과 비교하면 공격성이 크게 떨어지고 패턴 또한 단조롭기 그지없어 공격을 피하는 것에 어떠한 어려움도 없다.

  그렇다고 Devil May Cry를 캠페인 엔딩 한 번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시리즈에서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플레이는 단순히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 미션마다 S 랭크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 S 랭크를 기록하기 위해선 회복과 부활 아이템의 사용을 철저히 봉인해야 하며 또 같은 기술만을 반복적으로 쓰는 대신 최대한 다양한 기술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한다. 거기다 게임의 최종 난이도인 Hell and Hell에선 단 한 번의 피격도 허용치 않고 적들의 체력 또한 끊임없이 몰아 붙여야만 다 깎을 수 있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공격 일변도의 플레이를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기술의 활용으로 적의 공격을 끊임없이 피해내는 플레이가 요구된다. 적들의 공격을 통해 발생 가능한 변수가 지극히 적은 게임이라면 응당 Devil May Cry의 HaH와 같은 난이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덧붙여 일반적으로 잘하는 플레이만으로는 S 랭크를 기록할 수 없는 미션들이 간혹 존재해 그것에 대한 해결법을 강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Devil May Cry의 그 느려터진 적들은 Hell and Hell에선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오며, 사기적인 기술들 또한 S 랭크 달성을 위해선 그것들만을 반복적으로 써먹을 수 없다. 그렇기에 비록 보스를 포함한 적 디자인으로만 평가한다면 Devil May Cry 3이 4보다 더 나은 게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추가 난이도와 S 랭크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이용해야만 하는 갖은 도구들을, 4가지 종류의 스타일과 원거리/근거리의 각각 3가지 종류의 무기의 형태로 제시하고 또 관성으로 대표되는 물리 엔진과 경직치에 대한 고민 밑 폭넓은 활용을 요구하는 4편이 보다 혁신적이고 우수한 작품이다.

  <Resident Evil 6> 또한 그렇다. 비록 캠페인의 퀄리티는 Resident Evil 4에 비할 바 못 되나, 다회차 요소이자 사실상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용병 모드에서 플레이어는 슈팅과 체술을 유연히 오가며 적재적소에 활용하도록 요구받으며, 이러한 요구는 우수한 적 디자인과 결합하여 더욱 빛을 발한다. 캠페인만으로 Resident Evil 6을 평가한다면 좋은 점수를 절대 줄 수 없음에도, 이것이 현재까지는 최고의 TPS(Third-Person Shooter) 액션 게임인 이유는 바로 용병 모드에 있다.

  이렇듯 스코어링 시스템은 단순히 게임의 엔딩을 보는 것 이상의 플레이를 요구하는데, Hovertank 3D에서 스코어링을 완전히 배제하면 느릿느릿 떠다니는 적들을 쏴 죽이며 천천히 길을 찾는 식으로 플레이하는, 특별한 난관이 없는 지루한 게임이 된다. 그러나 게임이 요구하는 바대로 하이 스코어를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먼저 보너스 점수를 제공하나 적들이 파괴해버릴 수도 있는 오브젝티브들을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획득할 수 있고, 동시에 시간 보너스를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는 최적의 동선을 짜야 한다. 그 동선을 짜기 위해선 자연히 던전의 구석구석을 모두 탐색하며 적들과 오브젝티브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해둬야 한다. Hovertank 3D의 수집 대상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서로는 서로와 벽으로 구분지어져 있다. 레이더 상으로는 바로 옆에 있는 오브젝티브가 사실은 멀리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우도 많다. 또 각각의 오브젝티브는 그 오브젝티브를 파괴할 수 있는 특정 종류의 적 옆에 배치된 경우도 있기에, 그 오브젝티브들은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수집해야 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여러 번 반복 플레이하며 어떤 지점에 최우선적으로 도달해야 하는가 역시 기록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파악한 구조를 바탕으로 짤 수 있는 동선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그들 중 어떤 것이 최고의 점수를 기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플레이어의 충분한 다회차 플레이와 연구, 그리고 액션 수행 능력을 통해서만 도출된다. 또, 적들과의 전투도 최대한 빠르게 끝마쳐야 하기 때문에 커버 뒤에서 천천히 적을 기다리며 플레이할 수 있었던 기존의 원시적인 게임 플레이와는 상반된 플레이를 요한다. 여전히 좌우 이동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적들의 투사체를 피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커버 뒤에 숨는 것인 건 맞다. 그러나 시간 보너스를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선 거의 멈출 새 없이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고, 원거리 적들은 Wolf와 달리 히트 스캔이 아니라 투사체 공격을 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무빙만 제대로 한다면 충분히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고 전투 구간을 스킵할 수 있다. 또 적들을 죽이는 데에는 점수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필요한 적들만 죽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플레이가 요구된다.

  이렇게 매우 정확하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각각의 전투를 완벽히 마치거나 건너뛰고, 던전 벽에 부딪히지 않고자 노력하며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구조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하게 다룰 가치가 있다. 그렇다. Hovertank 3D의 스코어링 시스템이 유도하는 이 플레이는 스피드런의 방법론과 거의 동일하다. 가장 빠르게 게임을 끝마치는 것을 목표로 플레이할 경우 더 수준 높은 경기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상당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피드런으로 게임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스피드런을 구조적으로 요구하는 작품이 그만큼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Hovertank 3D는 스코어링을 통해 스피드런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것을 구조적으로 유도하며(애초에 시간 제한이 있다), 이것은 3D 게임들 중에선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가치가 있는 디자인이다.

  또 적의 투사체 공격을 3D 공간 상에서의 무빙으로 피하도록 요구하는 구조의 미션들이 상당히 많다. 특히 미션 12는 사방에서 투사체 공격을 하는 탱크들이 플레이어를 둘러싼 채 플레이어를 향해 집중 포화를 한다. 여전히 좌우 이동이 없는 고전적인 탱크 컨트롤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에 자유로운 무빙이 불가하고 적들의 명중률 역시 높은 편은 아니지만, 반대로 바로 그러한 점을 통해 보다 세심한 조작을 통해서만 투사체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한다. 앞서 Hovertank 3D의 전투와 던전 디자인이 매우 원시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그것은 스코어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평가했을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지적이다. 스코어링을 염두에 둘 경우, Hovertank 3D의 전투와 전체적인 난관의 디자인은 Catacomb 3D보다 더 우수하다. 




  이와 같이 최적의 경로를 찾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의 게임 디자인을 반드시 기억해두길 바란다. 이후 이 점을 제대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id의 다른 작품을 비평할 일이 있을 것이다. 

  Hovertank 3D의 이러한 고속 액션은 Wolfenstein 3D에 이르러 좀 더 발전한다. 우선 Wolfenstein 3D의 전체적인 게임 디자인은 던전 탐색과 액션을 함께 갖춘 Catacomb 3D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바로 슈팅과 레벨 디자인, 즉 지형의 결합이다. id 이전의 고전적인 DRPG에서의 전투는 지형적 요소가 끼치는 영향이 거의 없거나 끼치더라도 그 수준이 저열했다. Wizardry의 경우 특정 지역에선 특정 몹이 자주 등장하는 등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조건을 설정하는 데에는 레벨 상에서의 위치가 영향을 미치긴 했으나, 전투가 이루어지는 동안엔 전장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Wizardry의 전투는 상당히 깊이가 있고 전략도 중요했지만, 중요한 것은 지형과 전투가 별개의 요소였단 사실이다.

  Wolfenstein 3D보다 반년 앞서 발매된 Ultima Underworld는 온전한 3D 공간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고, 모든 탐색과 문제 풀이가 그것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이루어졌다. 동시기의 그 어떤 게임들도 Ultima Underworld가 보여준 3D 공간의 구현이라는 기술적 진보와, 여러 다양한 도구들을 통해 그 3D 공간을 자유로이 활용하며 문제를 풀어내는 게임 디자인의 진보를 따라잡지 못 했고, 아직까지도 게임 디자인에 있어선 Thief나 System Shock와 같은 <Looking Glass Studio>의 다른 게임들을 제하면 Ultima Underworld란 산을 넘어선 3D 게임은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액션은 그저 기초만을 갖춘 정도였고 애초에 게임의 포커스도 아니었다.


Thief에선 Ultima Underworld를 기반으로 근거리 액션이 좀더 발전하기는 한다.
System Shock의 슈팅 역시 상대적으로 진일보했다.

  1990년의 <Eye of the Beholder(주시자의 눈)>는 격자식 던전을 실시간으로 이동하며 전투를 수행하게 하였고, 덕분에 액션과 지형의 상호작용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DRPG의 격자식 이동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고 플레이어와 적들의 공격도 격자식으로만 오갔기 때문에 액션과 지형이 상호작용하는 깊이가 얕았다. 격자식 이동/공격과 비격자식의 차이는, 비유하자면 가로 세로 19줄로 구성된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가로 세로 2줄로 구성된 바둑판에서 오직 가로 세로로만 이동할 수 있는 바둑알로 알까기를 하는 것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면에서 EotB의 전투는 깊이가 없었으며, 2 x 2 지형에서 탭댄스나 추면 대부분의 전투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는 점에서 지형과 액션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DRPG의 결점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형식은 각기 다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전투와 지형의 상호작용은 DRPG에게 있어 그렇게 중요한 화두는 아니었을 뿐이다. (다만 EotB는 액션과 지형의 상호작용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게임의 형식을 실시간으로 바꾼 대신 턴제의 전략성을 상실했고 또 던전 디자인도 게임의 극후반부를 제외하면 많이 단순한 게임이다. 실시간의 형식과 DRPG의 형식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실패한 작품이기에 그 구조의 저열함이 게임의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차라리 격자식 알까기가 더 가치 있는 경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id는 처음부터 액션과 지형의 상호작용을 3D 공간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의 초기작들을 보면 Super Mario Bros. 3의 영향을 받아 탐색을 중시한 플랫포머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마리오야말로 지형과 액션의 상호작용 그 자체 아니던가? Hovertank 3D부터가 슈팅/이동과 지형의 상호작용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Catacomb 3D 또한 그렇다. Hovertank 3D는 원거리 공격을 하는 적들의 투사체를 지형으로 막거나 고속 무빙으로 회피해야 했고, Catacomb 3D는 적들이 플레이어를 사방에서 덮치기에 그 포위로부터 빠져나가 유리한 지형적 위치를 선점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구석으로 들어가 적들을 화면 안쪽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이러한 3D 지형의 전폭적인 활용은 기존의 아케이드 슈팅 게임에선 확인할 수 없었던 요소이다.

  그렇기에 사실 id에게 있어 Wizardry와 같은 DRPG보다 깊이 있는 던전을 구현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만일 그것이 목표였다면 액션 게임이 아니라 그냥 DRPG를 만들었을 것이다. 존 로메로에게 진정으로 중요했던 것은 3D 공간의 모든 지형적 요소가 그대로 액션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플랫폼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점프라는 액션을, 3D 공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슈팅과 무빙으로 발전시켰다 할 수 있다.

  즉 Wolfenstein 3D의 의의는 3D 액션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는 데에 있다. 우선 몇몇 보스를 제외한 그야말로 모든 적이 히트 스캔의 공격을 한다. 거기다 배후에서 피격당할 경우 추가 체력 피해를 입는다. 적의 위치를 제 시간에 파악하지 못 했을 때의 처벌이 Hovertank 3D보다도 더 가혹하기에 더욱 신중하게 지형을 탐색하며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위치의 이점을 살려서 전투를 수행하며 나아가야 한다. 거기다 에피소드 3부터는 Catacomb 3D보다도 더 빈번하게 사방에서 플레이어를 덮치는 함정이 등장하며, 그러한 구간들에선 빠르게 앞으로 전진하며 적들을 바로바로 처리해야 한다. 또 Wolfenstein 3D는 변수가 다량 존재한다. 플레이어와 적의 공격력과 명중률이 모두 유사 난수의 영향을 받는다. 또 적들의 행동 패턴도 매우 단순할지언정 매번 조금씩 다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액션이 매번 똑같이 전개되는 것을 막고자 시도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Wolfenstein 3D를 구조적으로 분석하면 이것이 요구하는 플레이는 던전 탐색을 완벽히 마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던전 탐색을 완벽히 마치는 기준 중 하나가 레벨 상의 모든 적을 죽이는 것, 즉 킬 100%이다. 즉 여전히 Wolfenstein 3D는 던전 탐색이 가장 중요하나, 적들과의 전투 또한 그것과 거의 동일한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Wolfenstein 3D의 레벨을 ‘던전 탐색의 대상’으로만 보는 경우 Wizardry의 열화판이라는 평가가 가능하지만, 이것들을 액션이 이루어지는 전장으로서 평가할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들이 플레이어의 시야 바깥의 매 구석마다 잠복해 있고, 또 어떤 방은 출구가 여러 개라 플레이어가 눈치 채지 못 한 사이 다른 출구로 빠져나와 플레이어의 후방에서 등장하는 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실시간으로’ 압박을 가한다. 즉 본 웹진에서 비평한 바 있던 <Ninja Gaiden II>와 같이 시야 바깥의 규칙을 예측하는 플레이가 요구된다. 해당 비평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러한 시야 바깥의 규칙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은 대부분의 3D 액션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특징이며, 스텔스 형식의 게임들의 경우 더욱 그러한 특징이 부각된다.

  거기다 이들의 공격은 모두 히트 스캔이다. 모든 적이 히트 스캔의 공격을 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모든 적이 자신들만의 ‘킬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킬존 안에 플레이어가 들어서는 순간 빠르게 반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피격당할 수밖에 없다. 먼저 빠르게 죽이거나 지형 뒤에 엄폐해야만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의 전투 수행은 언제나 지형적 이점과 적들의 움직임과 공간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은 곧 Wolfenstein 3D의 레벨 디자인이 비록 Wizardry의 갖가지 함정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Wizardry의 방식이 아닌 액션 게임의 방식으로 플레이어를 충분히 잘 압박함을 증명한다. 특히 에피소드 6의 여러 레벨들은 기둥이 곳곳에 배치되어 플레이어의 시야를 가리는 한편 사방에서 적들이 접근하여 플레이어를 덮칠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다. 이러한 적들에겐 개방되었으나 플레이어에겐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든 간 온갖 적들의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전장은 아직 제대로 된 3D 액션 게임이 없었던 그 당시 우수한 3D 레벨 디자인의 선례가 되어주었다.






유독 Wolfenstein 3D의 녹화 영상 파일이 위와 같이 깨진 상태로 저장되는 경우가 많아
더 많은 예시를 업로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양해 바란다.

1-3. New form 


  그 당시 어떤 게임도 Wolfenstein 3D와 같은 3D 공간의 활용과 고속 액션의 결합을 보여주지 못 했다. 따라서 이것을 ‘FPS의 시초’라고 보는 관점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본 웹진의 생각은 다르다. Wolfenstein 3D의 이러한 구조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제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 작품의 전투 상황은 사실상 건 슈팅 게임Light Gun Shooter과 동일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건 슈팅 게임에는 공간이 없다.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하며,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는 환상을 주는 게임들도 사실상 배경이 이동하는 것이지 플레이어가 3D 공간 안에서 자유로이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 3D 공간은 3D 공간이 아닌 그냥 단순한 배경의 역할만을 하며, 그 배경 위로 등장하는 적들 또한 3D 공간상을 자유로이 활보하며 플레이어를 압박하는 적이 아니라 그냥 스크립트에 의해 모션을 선보일 뿐인 과녁에 불과하다.(건 슈팅 게임이 가치가 없는 형식이란 말은 절대 아니다.)

  물론 Wolfenstein 3D에는 공간이 실재한다. Hovertank 3D나 Catacomb 3D와 같은 조상들부터가 3D 공간상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으니. 적들과 플레이어 모두 실재하는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며 서로를 압박한다. 그러나 적들이 3D 공간상에서 변칙적으로 이동하고, 플레이어 또한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주면서 그 변수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은, 사실 FPS뿐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3D 액션 게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가령 2D 액션 게임에서 단순히 2D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기존의 다른 게임들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가? Wolfenstein 3D 또한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한다. 기존에 이와 같은 3D 고속 액션 게임이 없었던 건 맞지만, 3D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액션은 필연적으로 3D 공간의 활용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결국 실질적인 전투가 이루어지는 지점, 즉 플레이어와 적들이 만나는 순간 어떻게 다른 형식들과 차별화된 전투를 보여주는가가 관건인데, 적들은 플레이어 가까이 다가온 뒤엔 사실상 그냥 멈춰 서서 공격만을 반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슈팅 역시 가만히 멈춰서서 적들을 조준/발사하는 수준에 그친다. 또 앞서 두 차례 언급했듯 Wolfenstein 3D의 적들은 모두 히트 스캔의 공격을 한다. 그들의 킬존에 플레이어가 들어서거나 플레이어의 킬존에 그들이 들어서는 순간 플레이어는 곧바로 그곳에서 빠져 나오거나, 최대한 빠르게 그들을 조준하여 경직시키거나 죽이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가 된다. 여기서 ‘곧바로 그곳에서 빠져 나온다’는 선택지는 분명 애초에 공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건 슈팅 게임에선 제시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화면 안의 적을 정확히 조준해 쏴 죽이는 것’은 건 슈팅 게임의 형식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즉 3D 공간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평소의 상황에서 벗어나 막상 전투에 돌입하면 사실상 건 슈팅 게임과 동일해진다는 점에서 Wolfenstein 3D가 3D 액션 게임의 기틀을 다졌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형식의 게임들과는 구분되는 완전히 독자적인 새로운 형식을 제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점만큼은 강조하고 싶다. Wolfenstein 3D는 3D 공간에서 액션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3D 게임의 경우 카메라 바깥의 변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레벨 디자인은 또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 청사진을 제시한 작품이다. 즉 다른 3D 액션 게임들과 명백히 구분되는 다른 형식으로 분화한 게임은 아니지만, 모든 3D 액션 게임에 통용될 수 있는 형식적 기반을 마련했다. 물론 진짜 3D 그래픽이 아닌 2.5D이고 위 아래로 카메라를 돌릴 수조차 없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적인 측면이 아닌 3D 공간과 액션의 결합이나 3D 공간에서의 적들의 움직임, 3D 지형과 슈팅의 상호작용, 그리고 액션에 어울리는 레벨 디자인이라는 게임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지금의 3D 액션 게임들, 특히 3D 슈터들에 아직까지도 Wolfenstein 3D의 영향이 남아 있다. 기술의 진보와 게임의 진보는 달리 보아야 한다.

  그렇게 id의 1992년은 끝났다. Wolfenstein 3D의 단점만을 부각한 글이 된 모양새이지만, 새로운 형식이 탄생하게 된 경위를 조망하는 비평으로서 Wolfenstein 3D가 어째서 전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한 게임이 아닌가를 서술했을 뿐, 그것이 별 가치가 없는 게임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비평의 의도는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모든 게임이 새로운 형식을 제시해야만 가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며, 기존에 존재하는 형식을 큰 틀로 삼아 구조적으로 여러 변화점을 주어 다른 게임들과는 차별화되는 발전된 플레이를 보여준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형식의 발전을 이끌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게 평가할 수 있다. Wolfenstein 3D는 던전 탐색, 고속 액션과 3D 공간의 결합, 그리고 슈팅과 지형의 상호작용을 모두 함께 선보였기에 상당히 이색적이고 가치 있는 액션 게임이고, 3D 액션의 기틀을 마련한 혁신이며, 관점에 따라선 바로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틀이라고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어쩌면 id는 Wolfenstein 3D까지만 내놓고 게임사에서 퇴장했더라도 후대의 재능 있는 창작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위대한 개발사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id에게 있어 Wolfenstein 3D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Wolfenstein 3D를 내놓자마자 그들은 또 다른 3D 게임의 개발에 착수했다. Wolfenstein 3D보다도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빠르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Next; Doom 1
-Lee Yin



[1] RPG에서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오해는, 비선형성을 통해 구현되는 플레이어 고유의 서사가 중요한 RPG의 형식적 특징이 와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 인용 


FPS에 담긴 3D 공간의 철학이 DRPG의 유산임을 세밀히 언급한 인용 블로거는 FPS에 명백히 존재하는 아케이드/콘솔 게임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선택적으로 배제하고 FPS를 PC 게임의 계보에 편입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넷플릭스(Netflix)에서 최근 방영하는 하이스코어(Highscore) 드라마를 시청하면 해당 블로거의 논평은 간단히 반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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