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1993.12.10
개발사 id Software
디자이너 John Romero, Tom Hall, Sandy Peterson
프로그래머 Dave Taylor, John Carmack, John Romero
실기 PC
id Chronicles (1) 링크
1. The Dawning
1993년 12월 10일 출시, <Doom(둠 1)>은 Wolfenstein 3D가 다져 놓은 기반을 그대로 계승했다. 1인칭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3D 공간의 탐색, 그리고 3D 공간/지형지물과 고속 액션의 상호작용이란 부분에서 Wolfenstein 3D는 3D 액션 게임의 기본적인 밑바탕을 완성했다. 시야의 사각마다 배치된 적들은 3D 공간에 대한 꼼꼼한 탐색을 요하고, 독자적인 AI를 가지고 지형지물의 저편에서 움직이는 적들은 플레이어가 자각하지 못 한 새 사방의 문과 공간으로 침투해 플레이어를 덮친다. 이러한 방식으로 Wolfenstein 3D는 3D 게임이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시야의 제약을 게임 디자인적 측면에서 최대한 활용했다. 특히 에피소드 6의 난관들은 대부분 플레이어의 시야를 가리는 지형지물과 그 뒤에 숨은 채 끊임없이 이동하는 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점들은 Wolfenstein 3D가 기존의 2D 액션 게임들이나 DRPG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의 작품임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비록 전투 이외의 상황들에선 이러한 3D 공간의 활용이 돋보이지만, 전투 상황에선 3D 공간이 거의 전혀 활용되지 않고 사실상 건 슈팅 게임과 같은 방식의 액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것이 3D 액션 게임의 기반을 다졌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3D 게임들과는 차별화된 형식, 즉 최초의 FPS 게임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전 글의 요지였다. 모든 3D 액션 게임들은 3D 공간의 활용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Wolfenstein 3D는 그것의 선구자격 작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 기반만큼은 아직까지도 3D 액션 게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겨우 1년 뒤에 발매된 Doom에도 Wolfenstein 3D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동시기에 개발된 Wolfenstein 3D의 스탠드 얼론 확장팩 Spear of Destiny는 Wolfenstein 3D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존 카맥이 Doom만을 위한 엔진도 따로 개발할 정도로 id Software는 Wolfenstein 3D의 게임 디자인은 그대로 계승하되 그 그늘에선 벗어나고자 했다.
1-1. Variables On Movement
Wolfenstein 3D를 격자식으로 이동하는 작품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플레이어는 명백히 360도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고, 슈팅 또한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여전히 격자식 이동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Wolfenstein 3D에서 앞 방향키를 1초 간 누르면 앞으로 x만큼 이동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명제는 바로 눈앞에 지형지물이 가로막고 있지 않는 한, 어떠한 상황에서건 참이다. 언제 건 앞 방향키를 1초간 입력할 시 플레이어는 정확히 x만큼만 앞으로 이동한다. 2초를 누르면 2x, 3초를 누르면 3x 기타 등등. 다른 모든 조작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플레이어의 입력은 모두 1대1로 대응되는 값만을 결과로 도출한다. 정확히 플레이어의 입력값만큼만 이동하는 것 또한 격자식 이동의 특징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선 Wolfenstein 3D는 여전히 격자에 갇힌 작품이다.
다만, Eye of the Beholder가 2x2 격자의 바둑판 위에서 가로 세로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라면, Wolfenstein 3D는 한 100 X 100 격자의 바둑판에서 대각선으로도 이동이 가능할 뿐이다. 플레이어는 여전히 눈금 위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딱딱 떨어지는 이동과 조준만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전투 상황에서 Wolfenstein 3D의 이동이 가진 목적은 단순하다. 근거리의 적들에게 위협을 받는 비안전한 곳에서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이나 지형지물로 가로막힌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 이것이 이동의 전부였다.
Doom은 거기에 관성, 즉 물리를 변수로서 추가했다. 관성으로 인해 플레이어의 이동은 그 속도의 계산뿐만 아니라 목적까지도 다분화했다. 기존의 액션을 계속 수행할 것을 장려하고 기존과 다른 방향성을 가진 새로운 액션을 취하는 것을 저해하는 관성의 특성은 액션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흐름Flow을 만들어준다. 맵을 통과함에 있어 관성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특정한 경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다소 관념적일 수 있으나, 이 흐름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적극 활용하는 플레이어는 난관을 보다 유연하고 수월히 돌파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에겐 페널티가 부과된다. 비유하자면 순풍과 역풍의 차이와 같다.
비유와 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세세하게 설명해보겠다. 가령 Wolfenstein 3D에서 플레이어가 문 건너편의 다른 곳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간단하다. 스페이스바를 눌러 문을 열고, 위 방향키를 꾹 누른 채 달려가는 것이다. 반면 Doom에서는 Wolfenstein 3D와 같은 방식으론 가장 빠르게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Doom에서 플레이어는 먼저 스페이스바를 눌러 문을 열고, 문이 열리는 동안 뒤로 살짝 물러선 후, 문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에 문을 지나갈 수 있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위 방향키를 꾹 눌러야만 한다. 관성으로 인해 최대 속도에 도달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며, 또 지형지물과 부딪힐 경우 관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Doom에서의 이동은 단순히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함만이 아니다. 관성을 축적하거나 축적한 관성을 손실하지 않기 위함도 있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장 빠르게 이동키 위해 플레이어는 보다 정확한 조작을 요구받고 최단 경로에 대한 계산도 보다 복잡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최단 경로가 Doom의 레벨을 관통하여 부는 순풍이다. 그 순풍을 찾아 최대한 활용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실시간의 입력과 대응이 필요하며, 그러한 실시간의 입력은 다시 플레이어의 관성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준다.
물론 Doom은 플랫포밍과 같이 관성의 풍부한 활용이 요구되는 난관들을 다수 제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만약 Doom의 전투 역시 Wolfenstein 3D와 마찬가지로 그저 근거리의 적들을 최대한 빠르게 쏴 죽이는 것이라면, 이러한 관성의 추가가 가진 장점이 전혀 돋보이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Wolfenstein 3D에 그대로 관성만을 추가하더라도 여전히 플레이어의 이동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은 빠르게 쓰러뜨릴 수 없는 적들의 근거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일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대단한 개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스코어링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Doom에는 스코어링이 없다.
1-2. Projectiles
그러므로 이 두 번째 변화가 중요하다. 몇몇 보스를 제한 Wolfenstein 3D의 적들은 모두 히트 스캔의 공격을 한다. 적들을 맞닥뜨렸을 때 플레이어에게 허용된 최선의 선택은 적들을 최대한 빠르게 죽이거나,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지형지물 뒤에 숨는 것이다. 반면 Doom에는 히트 스캔이 아닌 투사체 공격을 하는 적이 다수 있다. 이들과 대적할 시 플레이어에게는 Wolfenstein 3D에선 허용되지 않았던 한 가지 추가적인 선택의 길이 열린다. 이동으로 투사체를 피하는 것.
이를 위해 좌우 이동에도 각각 독자적인 키가 할당되었다. Wolfenstein 3D에선 좌우 이동을 위해선 좌우 조준을 포기해야 했으나 Doom에선 단순히 반점과 점을 누르는 것으로 각각 좌와 우로 이동할 수 있기에 좌우 이동과 조준이 동시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 활용한 기술인 Circle Strafe도 탄생하게 되었다. Circle Strafe란 좌나 우로 계속 이동함과 동시에 이동하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화면을 옮기면서 발사하는 기술인데, 그렇게 이동하는 모습이 원 모양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하여 Circle Strafe라는 명칭이 붙었다. 물론 요즘에야 Doom과 Doom II를 플레이하는 모두가 키보드와 마우스를 모두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조준/슈팅과 이동의 이원화 구조를 터득하지만, 그 당시엔 거의 모든 게이머가 키보드만을 통해 Doom을 플레이하였기에 조준과 이동을 따로 조작하는 것은 나름 고난이도 기술로 취급받았다. 심지어 Quake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Circle Strafe를 구사하는 법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Doom은 투사체 공격의 추가를 통해 조준/슈팅과 이동의 이원화 구조를 단순히 구현한 것을 넘어 적극 활용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이동의 목적에 ‘투사체 공격을 피하는 것’이 추가되었기에, 플레이어의 이동과 관성, 그리고 지형지물의 상호작용이 보다 치열하고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간단히 말해 변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한다. 다수의 투사체를 피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관성을 적극 활용해야 하고, 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형지물과의 충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적을 향해 발사하기 위해선 화면의 중앙을 적에게 고정해야 하므로 주위의 지형지물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하다.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언제나 주변의 지형지물을 머릿속으로 그려놓고 그 위치를 예상하며 플레이하게 된다.
투사체 공격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해오는 근거리 적들도 고려 대상이다. 지형지물과 Pinky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며, 설사 포위되었다 하더라도, Pinky의 공격을 유도한 후 회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은 유지할 수 있도록 보다 복잡한 이동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로 인해 Doom은 플랫포밍은 거의 없더라도 오롯이 전투 디자인만으로도 이동과 관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풍부한 활용을 요구한다. 슈팅만큼이나 이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자 슈팅과 3D 공간에서의 움직임이 언제나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것은 전투 상황에서만큼은 3D 공간의 활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Wolfenstein 3D와 Doom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3D 공간의 활용과 3D 공간에서의 고속 이동은 Doom의 게임 전체를 강하게 지배한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반드시 3D 공간의 이해와 이동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Wolfenstein 3D와 달리, 전투마저 건 슈팅 게임과 완전히 상이하다. Doom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형식인 FPS가 탄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동과 조준의 이원화는 DRPG로부터 물려받은 3D 공간의 활용과 1인칭 시점, 그리고 콘솔 게임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속 액션과 지형지물의 상호작용을 형식적 기반으로 삼은 FPS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추이자 FPS와 건 슈팅 게임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형식적 특징이다. 오롯이 관성과 투사체, 그리고 좌우 이동키의 추가만으로 Doom은 Wolfenstein 3D와는 그저 기반만을 공유할 뿐인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
3D 공간에서의 조준/슈팅과 이동의 이원화. 이 요소야말로 FPS란 형식의 가장 기본적인 충족 요건이며, 모든 FPS는 이 점을 기본 바탕으로 삼은 채 변화하고 발전한다. 이원화 구조를 제대로 활용하도록 요구하는 작품은 FPS이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건 슈팅 게임이나 적어도 FPS가 아닌 슈터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한 게임에서 스토리와 같은 쓸데없는 포장지를 모두 벗기고 그 구조를 정제했는데 거기에 ‘3D 공간에서의 조준/슈팅과 이동의 이원화‘가 없다면, 그것은 FPS가 아니다. 제 아무리 1인칭 시점에서 총을 쏘더라도, 그것은 FPS가 아닌 다른 형식의 작품이다. 조준/슈팅과 이동의 이원화 구조를 단순히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게임이 구조적으로 그것을 반드시 활용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 하다면, 그것 또한 FPS가 아니다.
FPS가 아닌 건 슈팅 게임이 가치가 떨어지는 형식이라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FPS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뿐이다. 여기에 컨슈머의 인식이나 장르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순수히 구조적 특징들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형식이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는 이동과 지형지물의 활용이 이루어진다.
1-3. Tool
물론 Doom의 가치가 단순히 FPS의 형식을 최초로 완성시켰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최초의 FPS였음에도 Doom의 여러 요소들은 사실상 FPS의 완성형에 가깝다.(사실 FPS란 형식 자체가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 했기 때문도 있다. Quake I 이후로 싱글 플레이어 FPS는 뚜렷한 발전이 없었고 <Doom Eternal(둠 이터널)>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형식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루기에는 조금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그 구조의 여러 특징들은, 비록 FPS의 충족 요건이 되지는 못 했으나, 이후 오래토록 FPS 형식의 작품들 전반에 공유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분류는 탄종이다. 체인건과 권총/플라즈마 라이플과 BFG는 각각 탄종을 공유한다. 권총을 쓸 일은 거의 없기에 전자는 별 의미가 없는 탄종의 통합이지만, 플라즈마 라이플과 BFG는 둘 모두 활용도가 높은 무기이며 따라서 탄약 관리가 체인건에 비해 훨씬 빡빡하다. 탄종과 경직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다면, 플라즈마 라이플은 체인건의 완벽한 상위호환이다. 그러나 탄종과 경직률의 존재로 인해, 플라즈마 라이플과 체인건은 모두 ‘유용’하게 쓰인다.
이처럼 Doom의 모든 무기들은 리스크와 리워드의 분배가 매우 훌륭하다. 제각기 다른 장점과 단점을 통해 그 무기에 가장 어울리는 독자적인 용도가 배정되어 있다. 샷건은 발사 속도가 느리지만 한 번에 발사하는 총알의 수가 많아 그것들을 모두 하나의 적에게 맞추었을 경우 적을 경직시킬 확률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히트 스캔에 명중률과 데미지 모두 괜찮기에 장거리에서도 유용하다. BFG는 플레이어의 화면 안에 포착된 모든 적에게 피해를 입힌다. 이 독특한 특성을 활용하여, BFG를 근거리의 벽에 맞추자마자 다수의 적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게끔 이동하여 BFG의 탄속이 느리다는 단점을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즈마 라이플과 탄종을 공유한다는 점, 그리고 발사 당 소모되는 탄약의 수가 매우 높다는 점 때문에 신중한 활용이 요구된다.
로켓 런처 또한, 어쩌면 그 어느 무기보다도 더 개성적이다. 발사 속도는 샷건과 유사하고 투사체를 발사하지만, 지형이나 적들과 충돌하는 순간 광역으로 높은 피해량을 가한다. 비단 적에게만 가하는 것이 아니다. 플레이어 또한 데미지 범위 안쪽에 위치한 경우 그대로 피해를 입는다. 이 무기는 지형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뿐만 아니라, 적과 플레이어 그리고 지형 간의 위치 관계 또한 무기를 사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채택했다.
또 로켓에 피격 당한 물체를 뒤로 밀어내기에, 이를 활용하여 멀리 떨어진 플랫폼으로 점프할 수 있는 로켓 점프 또한 구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로켓 점프는 우연히 구현된 것이 아니다. Doom의 레벨들 중에선 로켓 점프를 활용하도록 강요하는 레벨이 존재한다. Mt. Erebus에서 비밀 레벨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로켓 점프를 활용해야만 하며, 이는 로켓 점프가 명백히 의도된 ‘도구’임을 증명한다. 물론 대각선 이동Straferunning을 통해서도 이 비밀 스테이지에 진입할 수 있으나, 오히려 대각선 이동이야말로 의도되지 않은 기술이었으며 Doom이 발매된 지 무려 1년이나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이는 존 로메로의 발언을 통해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1]
마지막으로 Doom의 무기들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기나긴 교체 시간(딜레이)이다. 이 교체 딜레이는 거기다 무기 장전 시간 또한 포함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난관에 진입하기 전에 각각의 난관에 알맞은 ‘도구’로 사전에 미리 교체하도록 요구한다.
Doom에서 활용 가능한 중요한 도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내분 시스템이다. Wolfenstein 3D의 적들은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적들의 총알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로 관통하여 그대로 플레이어에게 날아온다. 그렇기에 사실 Wolfenstein 3D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눈앞에 있는 적이 아닌, 그 적에게 가려진 채 뒤에서 플레이어를 공격하고 있는 적이다. 플레이어의 총알은 적을 관통할 수 없기 때문에 후열의 적들은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있으나 플레이어는 후열의 적들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Doom은 다르다. 적의 공격은 서로를 관통할 수 없다. 관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격 시 피해도 입힌다. 모든 적들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만을 적으로 규정하지만, 아직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지 않았고 다른 적들에게서 먼저 피해를 입은 적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자신들을 공격한 다른 적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를 내분이라 한다. 내분의 장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적 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들과의 전투를 최대한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타파하기 지극히 어려운 난관조차 내분을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수월히 깰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내분에도 제약이 있다. 투사체 공격을 하는 적은 같은 종류의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 그렇기에 Imp와 Caco Demon과 같은 적들은 사실상 동족과는 내분을 벌이지 않는다. (물론 동족의 투사체 공격에 피해를 입지만 않을 뿐 투사체 공격을 흡수하기는 한다는 점 때문에 전열의 적들을 후열의 공격을 막아주는 지형처럼 활용할 수 있기는 하다.) 플레이어는 이 제약을 고려하여 내분을 활용할 수 있는 난관과 그렇지 않은 난관을 분류한 후, 어디서 어떠한 움직임을 통해 내분을 일으킬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무기와 내분은 모두 플레이어에게 허용된 도구이다. 각각의 도구는 고유한 제약과 장점을 통해 고유한 용도를 갖는다. 어떠한 무기이든 간 모든 난관에 대한 해답으로 통용될 수 없으며, 플레이어는 언제나 자신에게 허용된 도구들을 수시로 바꿔가며 경기에 임해야 한다. 하나의 난관에 가장 정답에 가까운 도구가 정해져 있다 할지라도 플레이어의 액션 수행 능력만 우수하다면 충분히 정답이 아닌 도구의 활용을 통해서도 돌파가 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그리고 정답이 아닌 도구로 각각의 난관을 돌파하는 것은 분명 더 높은 경지의 액션 수행 능력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다른 도구의 탄약을 아낄 수 있다는 명확한 리워드를 제공한다.
모든 도구에 대한 리스크와 리워드의 적절한 분배, 그것이야말로 액션의 깊이를 추구하는 수준 높은 게임 디자인이며, 유용한 도구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Doom은 이미 거의 FPS의 완성형에 가까운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후 콘솔 FPS가 단 두 종류의 무기만을 허용했다는 것을 보면 FPS가 id Software 이후로 어떻게 퇴보하기만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2. A New Phase
그런데 본 웹진이 앞선 비평들에서 수도 없이 언급했듯,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와 난관의 합이다. 플레이어에게 허용된 도구들이 실제 게임 플레이에서 충분히 활용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난관의 몫이다. 제아무리 우수한 무기 체계를 갖춘 게임이더라도 난관이 그 체계의 활용을 요구치 않는다면 무기 체계에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도구와 난관, 이 둘은 절대 떼어놓고 별개의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2-1. Shooter Dungeon
Doom 레벨 디자인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는 DRPG의 던전과 유사하다. 단지 그것을 액션 게임의 형식에 맞게 변형을 가했을 뿐이다. 특히 적들을 쏟아내는 방식의 함정이 굉장히 자주 쓰이는데, 키 아이템을 획득하거나 특정 위치에 도달하면 뒤쪽의 벽이 열리면서 적들이 나타나 플레이어에게로 달려드는 방식이다. 그 외에도 Wizardry의 다크 존과 같이 계속 불이 깜박거리면서 플레이어의 시야에 제약을 두는 함정이나, 천장이 계속 내려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하여 타이밍에 맞추어 지나가야 하는 함정 등도 존재한다. 턴제의 함정들을 실시간 게임에 어울리게 잘 변형시켰으며, 이러한 함정들의 변화만으로도 사실상 함정이 없는 수준이었던 Wolfenstein 3D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레벨을 갖추었다.
그러나 함정보다도 더 중요한 진보가 있었다. 우선 경기 진행에 필수적인 힌트들이 모두 문자의 형태가 아닌 시각 정보의 형태로 제공된다. 플레이어가 갈 수 있는 곳과 가야할 곳은 모두 레벨의 다른 지점에서 창 너머로 보이게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바로 난관의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각 정보를 입수한 플레이어는 그것을 바탕으로 공간에 대한 탐색을 수행하여 비밀 벽이나 스위치, 또는 키 카드 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은 어떤 힌트를 제시받고 그것과 퍼즐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골몰히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즉각적인 정보 제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공간의 실시간 탐색으로 퍼즐의 풀이 과정을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한 오토맵의 추가는 플레이어가 맵을 손수 그려가며 플레이해야할 필요성을 없앴지만, 오롯이 실시간으로만 확인 가능하다는 점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오토맵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적들에게 견제 당한다. 오토맵을 확인하건 레벨을 탐색하건 퍼즐을 풀이하건 언제나 실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비단 탐색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Wolfenstein 3D와 비교를 해보겠다. Wolfenstein 3D에서 액션은 각각의 구역들에 분리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가까이 다가오거나 근거리에서 총을 쏘기 전까지 적들은 앉은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도 그 활동 반경이 좁다. 그렇기에 플레이어가 어느 지점에 들어서거나 총을 발사하였다면 오롯이 그 구역의 적들만이 난관의 구성품으로 제시되며, 한 구역의 적이 다른 구역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없다. 그렇기에 액션이 각각의 구역들에 분리된 채 다른 구역과는 별개로 이루어진다.
Doom도 적들의 구역 간 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역에서 구역으로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슈팅이다. Wolfenstein 3D에서 두 구역이 맞닿는 지점은 벽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벽으로 인해 두 구역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반면 Doom에서는 그것이 벽이 아닌 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디까지나 창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플레이어는 이쪽 구역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수 없고 저쪽 구역의 적들 또한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다. 하지만 슈팅만큼은 창을 넘어서 다른 구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저쪽의 적들은 창을 통해 플레이어를 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벽은 플레이어의 이동을 제약하는 대신 적의 슈팅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벽을 통한 분리는 곧 이동과 액션의 교류를 원천봉쇄한다. 반면 창은 플레이어의 이동에는 벽처럼 제약을 두지만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예 없애버린다. 그렇기에 창을 통한 분리는 이동을 통한 교류는 불가능하게 막지만 여전히 액션만큼은 자유롭게 오가도록 허용한다. 이로 인해 하나의 레벨 안에 존재하는 여러 구역이 전부 제각각의 독립적이며 분절된 개별적인 난관으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레벨 전체가 하나 되어 플레이어를 시종일관 압박한다. 특히 Doom은 격자식 던전에서 벗어났고 z축을 적극 활용한 레벨 디자인 덕분에 제각각 다른 지점에서 시작된 여러 구역이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더 다양하다. 단순히 경우의 수만 다양한 ‘가능성’의 차원을 넘어, 실제로 에피소드 1의 대부분의 미션들은 구역들이 교차되는 지점이 다수 포진해 있다.
말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을 가장 잘 활용한 에피소드 1 미션 7, Computer Station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해보겠다. 각각의 알파벳은 각각의 구역을 뜻하고, 직선으로 슈팅으로 상호작용 가능한 구역들을 연결해두었다. 예컨대 A 구역에 들어선 플레이어는 B와 C 구역의 적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당하며, D 구역에선 E, G, 그리고 F의 적들에게 공격당한다. 중요한 것은, 해당 미션을 깨기 위해선 L을 제외한 알파벳으로 표시된 구역들을 전부 반드시 한 번씩은 지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즉, H 구역에 들어설 땐 I와 F에게 압박을 받고, I 구역을 지날 땐 H 구역에 압박을 받으며, A 구역을 지날 땐 B와 C에서 지원사격을, B 구역을 지날 땐 A와 C로부터의 지원사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H 구간. 왼쪽의 F 구간의 적들이 계속해서 창을 통해 공격해온다.
J와 M의 중간 구간. K, L, 그리고 N 구간에서 창을 통해 공격해온다.
B 구간. C와 A 구간에서 창을 통해서 계속하여 공격한다.
이러한 디자인을 통해 플레이어는 각각 분리된 아레나 전투를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닌, 슈팅을 중심에 놓고 유기적으로 엮인 하나의 던전과 맞서 싸우게 된다. 또 다른 구역의 적들은 높이 차이나 먼 거리, 그리고 창문의 턱으로 인해, 같은 구역의 적들에 비해 처리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뛰어난 적 배치와 레벨 디자인으로 액션의 난이도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Doom의 레벨 디자인이 가진 최대 장점이다. 모든 우수한 DRPG는 던전이 하나 된 적으로서 플레이어와 대적한다. Doom과 비슷한 시기에 발매되어 상이한 길을 가고 있던 Looking Glass의 System Shock, Ultima Underworld, 그리고 Thief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플레이어는 언제나 저쪽의 퍼즐과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온 던전을 돌아다니며 힌트와 풀이, 그리고 해답을 찾게 되며, 이러한 비선형적인 던전 탐색을 통해 던전은 하나로 통일된다. 특히 미션제인 Thief와 달리, System Shock와 Ultima Underworld는 던전이 층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던전의 풀이를 위해선 반드시 모든 층을 반복적으로 오가야 한다. 이러한 하나의 유기적인 던전이 가진 통일성을 뛰어넘는 3D 게임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는 형국이지만, 적어도 Prey를 통해 훌륭히 계승되는 데에는 성공했다.
반면 Wolfenstein 3D와 Doom은 던전 탐색이 곧 게임의 모든 것인 DRPG와 달리 실시간의 형식을 수용하여 고속 액션과 3D 공간의 상호작용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비록 던전 탐색은 다른 DRPG처럼 던전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유기적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액션이 그렇지 못 한다면 FPS란 형식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던전 탐색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액션은 각각의 구역에 분절되어 있는 것이니 말이다. Wolfenstein 3D는 실제로 액션 수행 능력을 시험하는 난관들이 모두 구역별로 분절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액션과 레벨 디자인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 수준이 원시적이었다. 하지만 Doom은 창과 슈팅, 그리고 교차점이 다수 등장하도록 디자인한 레벨들을 통해, 비단 던전 탐색뿐만 아니라 슈팅을 통해서도 던전이 통일성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정적인 DRPG가 탐색과 퍼즐 풀이, 단서 수집을 통해 던전의 통일성을 추구했다면, 동적인 Doom은 슈팅을 통해 유기적이고 통일된 하나의 던전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던전 탐색이라는 점으로만 평가했을 시 Doom의 던전은 분명 DRPG의 고전들에 비해 상당히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Doom의 던전이 단순히 DRPG의 하위호환 수준으로만 평가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레벨 디자인은 현대 FPS가 Quake 1 이후로 완전히 상실해버린 가치이다. Doom Eternal은 분명 점프 발판이나 몽키 바와 같이 상호작용 가능한 도구들을 다양히 제시하여 보다 창발적이고 우수한 아레나 전투를 구성했지만, 각각의 아레나 전투는 언제나 던전과는 분리된 채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개별적인 전투 디자인은 Doom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진보해 있지만, 슈팅을 통해 하나로 엮이는 Doom의 던전 디자인에 비해선 상당히 저열한 던전을 가지고 있다. 아니, 조금만 과장하면 던전이 아예 없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유기적으로 엮인다는 환상만을 심어줄 뿐 사실상 일직선 진행에 불과하여 아무런 과장 없이 실제로 던전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연출만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복도에 불과한 레벨 디자인을 가진 퇴보한 FPS 게임인 Half-Life보다는 훨씬 발전해 있다.) 액션 게임이 과거를 지나 현재로 오면서 끊임없이 발전한 것은 맞다. 싱글 플레이어 FPS 또한 Doom Eternal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계속 진보했다. 그렇다고 게임이 모든 방면에서 발전만을 했다고 보는 관점은 명백히 틀린 것이다. 그러한 발전의 과정 속에 분명 기존에는 존재했던 가치가 상실된 경우도 많다.
2-2. Nightmare
다만 여기엔 이와 같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각 구역들로부터 끊임없는 압박을 받는다면, 그전에 각 구역의 적들을 사전에 전부 처리하여 다른 구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막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사실 Ultra Violence 난이도만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일견 타당한 주장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풀이를 원천 봉쇄하는 Nightmare가 Doom이란 게임을 어떻게 한 차원 더 높은 작품으로 만드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Nightmare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선 Nightmare 난이도가 단순히 Ultra Violence가 너무 쉽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존 로메로가 'Joke'로서 추가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소문의 1차 출처는 Doom fan wiki인데, 그곳에도 존 로메로의 인터뷰나 발언과 같은 출처가 써져 있지는 않았으며, 대신 Citation Needed, 즉 ‘출처 요망’이란 각주만 달려 있었다. 비단 Doom fan wiki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도 Nightmare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을 놀려주기 위해 추가되었다는 근거는 없었다. Nightmare 난이도는 발매 이후인 1.2 업데이트에서 공식적으로 추가되었고, 이후로도 게임에서 제거되지 않았으며, 후속작인 Doom II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존 로메로나 존 카맥, 톰 홀, 샌디 피터슨과 같은 id의 개발자들이 그러한 루머가 사실이라고 밝힌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Nightmare가 Joke 난이도라는 것은 출처도 근거도 알 수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2]
또 설령 Nightmare 난이도가 진짜로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농담거리로 추가되었다 할지라도, 게임 비평에선 단순히 그 의도만으로 Nightmare 난이도에 대해 다루지 않고 넘어갈 이유가 없다. 게임 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난이도가 게임의 가치에 기여를 하는가, 아니면 도리어 가치를 깎아먹는가뿐이다. 그리고 분명 Nightmare 난이도는 게임에 크나큰 기여를 한다. 기여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Ultra Violence와 사실상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더한층 완성도가 높은 게임으로 말이다.
Nightmare의 첫 번째 변화는 적들의 공격력과 이동 속도, 그리고 탄속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큰 변화는 아니다. 물론 게임을 훨씬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맞다. 문 너머의 히트 스캔 적들이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사격을 하거나, Pinky가 매우 빠른 속도로 플레이어를 향해 돌진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플레이어의 더 정확한 액션 수행 능력을 요구하는 것뿐, Doom이란 게임의 게임 플레이 자체를 완전히 바꿔놓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두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적 부활 메커니즘의 추가이다. 기존의 3D Trilogy와 달리 Doom은 스코어링 게임이 아니다. 단순히 미션을 끝까지 깨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기에 스코어링으로 인해 미션을 반드시 최대한 빠르게 깨야만 했던 Hovertank 3D와 달리, Doom은 Ultra Violence에선 그럴 필요가 없다. 천천히 적들을 쏘고 던전을 꼼꼼히 탐색해가며 진행하더라도 어떠한 불이익도 없다. 따라서 위에 제기된 반론처럼 다른 구역들의 적들을 먼저 모조리 처리하여 타 구역에 개입하지 못 하게 사전에 차단하는 것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적 부활 메커니즘은 이러한 플레이를 원천 봉쇄한다. 적들이 계속 부활하기 때문에 모든 구역은 언제나 소수나마 적들이 살아남거나 부활하여 타 구역의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그렇기에 Nightmare에서의 Doom은 슈팅이 시종일관 전체 레벨을 하나로 묶어주는 강력한 통일성을 가진다. 또 적들을 죽이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끊임없이 부활하기 때문에, 적들을 죽이는 행위 자체는 게임 진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바로 그 구간을 지나가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처리하면서 지나가더라도, 뒤에서 단 몇 초만 지나도 적들이 바로 부활하여 플레이어를 압박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최대한 빠르게 경기를 진행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렇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Hovertank 3D와 같은 게임 플레이, 즉 스피드런을 요구한다. Ultra Violence 플레이를 통해 비밀과 적, 그리고 키카드의 배치를 모두 파악한 플레이어는, Nightmare에 이르러선 이렇게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적의 동선을 짜야 한다. 가령 이 난관에선 어떤 무기로 돌파를 할 것인지, 이 지점에 있는 비밀이 제공하는 메가스피어를 획득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칠 것인지, 이 키 카드가 있는 지점까지 가는 동선이 다양한데 그 중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설계한 후, 액션을 통해 그 계획을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
적 부활 메커니즘으로 인해 사실상 제한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따라서 플레이어는 매 전투를 매우 정확하고 최대한 빠르게 마쳐야만 한다. 또 스피드런을 통해 게임을 깨야 하기 때문에 관성을 활용한 이동 기술들도 훨씬 더 유용해지고 어느 정도 강제된다. 적들을 통과해서 달릴 수 없다는 특징으로 인해 적들에게는 단순히 플레이어를 쏴 죽이는 용도 외에도 플레이어의 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써의 용도도 추가된다. 사실상 Doom의 게임 플레이가 가진 모든 장점을 몇 배는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난이도가 Nightmare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Doom과 같이 스피드런을 게임을 깨나가는 데 있어 반드시 채택해야만 하는 방법론으로 수용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Hovertank 3D를 다룰 때에도 언급했다시피, 가장 빠르게 게임을 끝마치는 것을 목표로 플레이할 경우 훨씬 수준 높은 경기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상당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피드런으로 게임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스피드런을 게임 내적으로 요구하는 작품이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Doom의 Nightmare는 분명 스피드런할 것을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며, 이것은 플레이어를 더 높은 경지의 게임 플레이로 이끌어주는 매우 우수한 게임 디자인이자, Ultra Violence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더 수준 높은 플레이를 요구하는 탁월한 난이도이다.
거기다 적의 부활 시간은 대략 10초 이상 30초 이내의 숫자들 중 무작위로 선택된다. 그렇기에 제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 경기에 임하더라도, 실제 게임 플레이 또한 반드시 계획대로만 진행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변수에 대처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즉흥적으로 다른 동선을 짜는 것 또한 실시간 게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이와 같이 Nightmare와 Ultra Violence가 사실상 완전히 다른 게임 플레이를 요구하기 때문에 Doom을 평가하는 데 있어 Nightmare를 절대 생략할 수 없다. Ultra Violence 난이도는 그저 비밀과 키 카드, 적의 위치와 같은 던전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말하자면 Nightmare를 깨기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하다. Ultra Violence로만 Doom을 플레이한 사람은 사실상 Doom을 아예 깨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기에, 반드시 어떠한 공략의 도움도 없이 Nightmare를 플레이해볼 것을 추천한다. 물론 수없이 좌절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위대한 경험은 없다.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보며 강팀들을 상대하는 약팀들의 분전과 승리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열세를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강렬한 도전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낱 관람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을 바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경험하게 하는 게임 플레이가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열세의 극복과 강대한 적에게의 도전은 어떠한 매체에도 없는 게임만의 특징이자 가치이다. 도전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3. Shortcoming
3-1. Action-adventure, or Action and Adventure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호평은 에피소드 1에만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 이후의 미션들은 솔직히 왜 이렇게 디자인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쉬움만 남는다.
앞서 Doom의 레벨 디자인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슈팅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 던전임을 지적했다. 문제는 이러한 레벨 디자인이 에피소드 1만 지나면 제대로 활용이 되지 않는다. 에피소드 1의 미션들은 대부분 구역과 구역이 창과 높이 차이 등으로 연결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제약을 가하는 한편 언제나 적들이 플레이어를 향해, 그리고 플레이어가 적들을 향해 슈팅할 수 있도록 설계해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에피소드 1의 초반 미션에서 후반 미션으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아마 모두에게서 가장 어려운 에피소드 1의 미션으로 평가받을 E1M3 Toxin Refinery보다는 E1M5 Phobos Lab에서, E1M5보다는 E1M7 Computer Station에서 구역 간의 슈팅을 통한 상호작용이 더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즉 레벨의 완성도가 에피소드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올라갔다가 사실상 마지막 미션인 Computer Station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는 사실은, id가, 더 정확히 말해 존 로메로가 에피소드 1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레벨 디자인 철학 또한 슈팅을 통해 구역과 구역이 상호작용하며 강력한 통일성을 유지하는 던전임을 증명한다.
그런데 에피소드 2 부터는 갑자기 이러한 디자인 철학이 사라져버린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몇몇 미션들의 몇몇 부분들엔 여전히 여러 구역들의 교차점이 등장하긴 하나 에피소드 1의 미션들만큼이나 빈번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때부터 슈팅은 하나의 구역에서 시작해 같은 구역에서 끝나버린다. 구역과 구역의 상호작용 같은 건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리며, 그렇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던전에 맞선다기보단 그냥 연달아 나열된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순서대로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미션을 깨나가게 된다. 이미 에피소드 1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완성시켜놓았던 가치를 갑자기 에피소드 2에서부턴 완전히 포기해버렸다는 것이 이해가 쉬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게임을 에피소드로 분할한 이상, 각각의 에피소드가 제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게 하고자 했다고. 사실 이러한 관점도 어느 정도 타당한 게, 에피소드 2는 분명 에피소드 1보다 더 복잡한 구조의 던전을 제시하기 때문에 던전 탐색과 키 카드를 통한 문제 풀이가 비교적 더 난해하다. 즉 에피소드 1에서 ‘액션으로 통일되는 던전’을 이미 완성도 높게 구현했으니, 에피소드 2는 좀 디자인 방식을 바꾸어서 ‘던전 탐색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비선형적인 던전’을 구현하고자 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의도에 맞게 나름 괜찮은 던전들이 제작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에피소드 1의 미션들은 마지막의 보스 미션을 제하면 모두 존 로메로가 디자인했고, 에피소드 2와 3은 전부 샌디 피터슨이 디자인했다는 점도 이러한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문제는, 샌디 피터슨이 제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절대 DRPG의 고전Classic들의 던전 디자인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에피소드 1처럼 아예 DRPG와는 다른 방향성을 추구한다면 당연히 DRPG의 던전들과는 또 다른 개성과 가치를 지닌 던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에피소드 2는 명백히 고전 DRPG들, 예컨대 Looking Glass의 던전 디자인과 같은 방향성을 추구한다. 던전 탐색과 퍼즐 풀이가 크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절대 같은 방향성을 가진 레벨 디자인으로는 Looking Glass의 던전, 아니 하다못해 Wizardry의 던전조차 뛰어넘지 못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id 엔진으로 개발한 Doom에는 분명 DRPG의 영향을 받아 퍼즐과 함정의 요소가 간략하게나마 잘 구현되어 있지만, 말 그대로 ‘간략하게나마’만 구현되어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아 DRPG에 비해선 퇴보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퍼즐을 사실상 키 카드와 버튼으로 통일시켜버렸고, 함정은 사실상 트리거를 발동하면 갑자기 벽이 열리며 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통일되어버렸다. 단순히 전체적인 구조만 복잡하게 설계한다고 훌륭한 던전이 알아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다양하고 위협적인 함정과 퍼즐을 배치하는 것 또한 구조의 설계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배치에 사용 가능한 함정과 퍼즐부터가 DRPG의 열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도구들로 디자인한 던전은 절대 DRPG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샌디 피터슨이 아니라 Prey의 라파엘 콜란토니오나 System Shock의 레벨들을 디자인한 레벨 디자이너가 와도 그냥 불가능하다.
문제 풀이가 그저 키 카드를 찾아 문을 여는 것뿐이고, 키 카드로 연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던전 진행과 탐색이 문 너머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으로 인해 비선형적인 디자인으로나 퍼즐의 수준으로나 그냥 Wizardry를 위시로 한 DRPG의 열화에 불과하다. 물론 몇몇 정말 디자인이 잘 된 던전도 존재한다. 가령 E2M6 Halls of the Damned는 허브 공간이 하나 있고 그 허브를 중심으로 총 세 갈림길이 등장해 각각의 갈림길에서 키 카드를 하나씩 수거하도록 요구한다. 키 카드를 하나씩 수거할 때마다 허브 공간에도 계속 새로운 종류의 적들이 등장하며, 이 적들은 또 가끔 갈림길을 타고 플레이어를 추적해오고, 구역들이 거의 다 낮은 천장과 비좁은 통로의 형식으로 디자인되어 있기에 액션으로나 던전 탐색으로나 상당히 수준 높은 경기를 제공한다. 거기다 가짜 exit과 같이 액션을 동반한 독특한 함정도 갖추었다.
이 레벨 외에도 특정 발판에 올라야만 진행 경로가 나타나는 퍼즐이나 Wizardry의 다크 존처럼 시야에 제약을 두는 난관이 등장하고, E3M5에선 여러 개의 텔레포트 발판 중 단 하나만이 키 카드가 있는 위치로 이어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소수의 미션에선 꽤 독특한 퍼즐과 함정이 등장하기는 한다.(사실 그마저도 Wizardry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들뿐이다. 그래도 다크 존만큼은 액션과 잘 결합하여 개성적인 난관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대부분의 레벨들은 진행 경로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어 던전을 헤맬 일이 전혀 없다. 에피소드 1에 비해 더 다양한 적들이 등장하나, 이들은 오히려 히트 스캔 공격을 하는 솔저와 좀비맨보다도 상대하기 쉽다. 또 언제나 하나의 구역 안에서 활보하는 적들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에, Wolfenstein 3D와 같이 커버를 악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각 구역의 적들로 인해 커버 슈팅이 억제되는 구간이 많았던 에피소드 1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이렇게 던전 탐색에 치중하고 액션성을 크게 줄인 에피소드 2의 미션들은 진행 경로만 알아내면 깨는 것이 못 깨는 것보다 쉬운 던전으로 전락해버린다. 즉 에피소드 1이 가지고 있는 다회차성이 전무하다. 에피소드 1은 진행 경로를 다 알고 있다 할지라도 히트 스캔의 적들과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레벨 디자인 탓에 액션 수행 능력도 출중해야 게임 진행이 가능하며, 또 적 부활 메커니즘과 경직률, 그리고 난수의 영향을 받는 무기 피해량 등 전투 상황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변수가 많다. 변수에 대한 즉흥적인 실시간 입력의 대응이 요구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다회차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반면 에피소드 2는 다회차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DRPG의 던전과 달리 첫 회차의 강렬한 도전도 없다. 이는 Nightmare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든 에피소드 2와 3을 Nightmare로 진행하는 것이 에피소드 1보다 훨씬 싱겁다고 느낄 것이다. Nightmare는 본질적으로 다회차에서만 공정한 경기 진행이 가능한 난이도인데, 애당초 다회차를 고려하지 않은 레벨 디자인이 갑자기 Nightmare에 이르러 특별한 가치를 드러낼 리 만무하다.
이것은 결국 Action과 Adventure의 분리로 말미암은 문제점이기도 하다. Doom에서 액션은 적과의 전투로 한정되어 있으며, 퍼즐 풀이는 대부분 키 카드를 찾아 던전을 탐색하는, 동적인 액션이 아닌 정적인 사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다이다. 최고의 Action-adventure 중 하나인 Super Mario 64나 Super Mario Bros. 3는 Action을 통해 모든 탐색과 퍼즐 풀이가 이루어진다. Super Mario Bros. 3에는 너구리 파워업을 먹고 등껍질을 잡은 채 날아 올라가야만 해결할 수 있는 퍼즐이 있다. 높은 곳에 위치한 탈출구와 등껍질, 그리고 계속 주어지는 너구리 파워업을 통해 플레이어는 어렵지 않게 퍼즐의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퍼즐의 해답을 아는 것만으로 퍼즐이 풀리는 일반적인 Adventure와 달리, Super Mario Bros. 3에선 반드시 그것을 액션으로 정확히 수행해야만 한다. Super Mario 64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 아무리 곳곳에 퍼져 있는 8개의 레드 코인 위치를 모두 알아내었다 하더라도, 날개 마리오 파워업을 통해 각각의 위치에 정확히 도달할 수 있어야만 스타를 획득할 수 있다. 이처럼 Super Mario 시리즈는 Super Mario Galaxy 이전까지는 언제나 Adventure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문제를 Action을 통해 풀어나가도록 요구했다. 이를 통해 Action과 Adventure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된 'Action-adventure'로서 엮였다. 퍼즐 풀이와 탐험에는 언제나 액션이 요구되므로 다회차성 또한 뛰어나다.
반면 Doom은 액션은 액션 따로, 퍼즐 풀이는 퍼즐 풀이 따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모든 퍼즐은 그 해답만을 안다면 곧바로 해결된다. 그렇기에 단순히 Action과 Adventure의 형식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 그렇다고 Adventure 부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Action-adventure가 아닌 Action and Adventure라 보는 게 더 합당하다.
4. Possibility
결과적으로 에피소드 2와 3은 에피소드 1에 비해 낮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에피소드 3만큼은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DRPG의 던전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쳤기에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에피소드 2와 달리 에피소드 3에 포함된 몇몇 미션들은 또 에피소드 2와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에피소드 2의 던전들은 키 카드로 잠긴 문으로 각각의 구역이 분리된 채로 던전 탐색이 이루어진다. 다음 구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전 구역에서 키 카드를 찾아야만 하며, 다음 구역으로 진입한 후엔 이전 구역으로 다시는 돌아갈 필요가 없다.
실례를 들어보겠다. 위는 E2M4 Deimos Lab의 맵을 구역 별로 색칠한 그림이다. 파란색 구역은 파랑 키를 찾은 이후엔 다시는 탐색할 필요가 없으며 노란색(읽는 분들의 눈 건강을 위해 주황으로 칠했다.) 구역 또한 마찬가지로 노랑 키를 찾은 이후엔 다시는 찾아갈 필요가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 진행 역시 파란색 구역에서 노란색, 그리고 노란색 구역에서 하얀색 구역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E2M3 또한 마찬가지이다. 파란색 구역에서 파랑 키를 찾아 문을 넘어서면 파란색 구역은 던전 탐색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이미 타파한 난관이 된다. 이후의 던전 탐색은 검정 구역에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각각의 구역이 여러 개의 통로와 방으로 구성해 있고 그 구역 안에서만큼은 온갖 다양한 경로로 비선형적인 탐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이 점만으로 에피소드 2의 레벨들이 선형적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역이 선형적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구역 안의 방들 또한 정해진 통로를 통해서만 선형적으로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플레이어가 처음부터 시작 지점에서 다른 모든 방들에 자유롭게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방에 있든간에 반드시 그 방과 통로로 이어진 다른 방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이 나쁜 디자인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E2의 레벨 디자인에 대한 분석이다. 각각의 구역과 방이 통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레벨을 구성하기 때문에 레벨을 탐색하기 위해선 반드시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야 한다. 또 구역에서 구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키 카드가 요구되며, 한번 다음 구역으로 진행하면 이전 구역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반면 E3의 몇몇 레벨들은 E2와는 완전히 다르게 디자인되어 있다. 위는 E3M6 Mt. Erebus 미션의 구조이다. 보다시피 각각의 방들이 넓은 오픈 필드의 이곳저곳에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방들은 아무런 키 카드의 습득이나 퍼즐 풀이 없이도, 그리고 굳이 정해진 통로를 통하지 않더라도 맵의 시작점에서의 자유로운 진입이 허용되어 있다. 애초에 방과 방을 잇는 통로 자체를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먼저 드넓은 오픈 필드가 있고 그 안에 아무런 순서 없이 자유롭게 진입 가능한 각각의 방들을 배치해놓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 풀이나 키 카드 수집 없이 방을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해서 진입할 수 있다. 철저히 통로를 통해서만 다음 방으로 진행이 가능하던 것과 달리 E3M6에는 애초에 방과 방을 잇는 통로가 없다.
이러한 레벨 디자인은 분명 에피소드 1이나 에피소드 2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굳이 Wizardry와 비교하자면 3층 던전과 유사한 구조이다. 차이점이라면, Wizardry는 플레이어의 모든 이동이 랜덤 인카운터를 발동시킬 수 있고, 또 던전에서 마을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므로 던전 탐색 또한 사실상 가장 가까운 방들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Wizardry의 3층 던전.
그러나 Doom엔 랜덤 인카운터가 없으며, 실시간으로 레벨의 이곳저곳을 별다른 리스크 없이 누비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E3M6의 레벨 디자인은 오히려 Wizardry보다는 Super Mario 64의 샌드박스 레벨이나, Super Mario World의 Forest of Illusion 월드(개별적인 스테이지가 아닌 전체 월드를 말하는 것이다)가 연상된다. Mt. Erebus 말고도 E3M2 Slough of Despair와 E3M7 Gate to Limbo(단 이 레벨은 E2의 레벨들과 샌드박스 레벨의 절충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레벨에서 중요한 것은 던전 탐색이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구역이 처음부터 접근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건, 바꿔 말하면 각 구역의 적들 또한 처음부터 온 맵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에피소드 2의 맵들은 언제나 통로와 문을 통해 다른 방들과 분절되어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다음 방이나 구역으로 진입하면 적들은 쫓아오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넓은 오픈 필드 위에 각각의 독립적인 방들이 설치되어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오픈 필드 안의 적들은 플레이어가 어느 지점에 있든 간 쉽게 쫓아올 수 있으며, 쫓아오지 못 하는 경우에도 적어도 플레이어를 향해 투사체를 던질 수는 있다.
즉 E1의 레벨들이 ‘슈팅’을 통해 각각의 구역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슈팅뿐만 아니라 적들의 직접적인 이동을 통해서도 플레이어에게 끝없는 압박을 가한다. E1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Doom만의 가치에 집중한, 적어도 그 디자인 의도만큼은 뛰어난 레벨 디자인이다. 거기다 Mt. Erebus에선 오롯이 로켓 점프를 통해서만 진입 가능한 비밀 스테이지를 배치하여 Action을 통한 탐험과 문제 풀이를 구조적으로 요구한다. 여전히 이렇게 Action과 Adventure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는 미션은 Mt. Erebus 단 하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E1과는 달리 E3의 샌드박스 레벨들은 완성도가 낮아 단순히 의도만 좋은 것에 그친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한 레벨 안을 돌아다니는 적들의 수가 너무나도 적다. 그래서 적들이 플레이어를 사방에서 포위한다든가, 플레이어의 게임 진행을 육탄 방어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E1의 레벨들은 적들의 수가 적더라도 플레이어가 언제나 비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는 제약이, 슈팅을 통한 압박과 적들의 육탄 방어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굳이 방에서 방으로 이동할 필요 없이 오픈 필드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샌드박스 레벨에선 그러나 적들의 수가 적으면 슈팅을 통한 압박도 육탄 방어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샌드박스 레벨들은 가능성을 보이기만 했을 뿐이다. 슈팅뿐만 아니라 적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서도 통일성을 띄는 레벨 디자인은 분명 슈팅으로만 각각의 구역들에 통일성을 부여한 E1의 레벨 디자인보다도 더욱 진보한 철학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레벨의 완성도 자체가 E1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다. 여전히 맵 곳곳에 숨은 키 카드를 발견하고 퍼즐을 푸는 과정은 E2만큼이나 단순하며, 그렇다고 E1만한 다회차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3는 한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액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탐색과 샌드박스 레벨들은 분명 제대로 디자인되기만 한다면 E1이나 E2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Doom에선 그것이 그저 가능성에 그치고야 말았으나, 시행착오의 과정 속에서 배운 것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이미 Doom의 도구 체계는 완벽하다. 모든 무기가 제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개성적이고 유용하다. 그렇기에 남은 과제는 그러한 도구들의 수준 높은 활용을 요구할 수 있는 레벨들을 갖추는 것이다. 에피소드 1만으로도 Doom은 영원히 플레이될 게임이지만, 분명 그 이상의 가치를 노려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Doom을 플레이하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E2와 E3의 모든 레벨을 디자인한 샌디 피터슨이 후속작에선 기량을 만개하는 데 성공했을까? 또 존 로메로는 E1의 슈팅을 통한 던전의 통일을 더욱 발전시켜서 더 나은 레벨들을 디자인했을까? 아니면 id의 모두가 첫 작품의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후속작을 내놓고는 전작의 성공에 안주했을까? 물론 Doom도,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후속작도 발매된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선, 우리 모두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
5/5
-Lee Yin
Next; Doom II: Hell On Earth
[1]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