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2019.3.22
개발사 FromSoftware
감독 Hidetaka Miyazaki, Kazuhiro Hamatani
실기 PC


0. 서문


하나의 작품이 모든 방면에서 실패하기란 의외로 어렵다. 당연하게도, 한 명의 비평가가 그런 작품을 가리켜 전방위로 실패했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 사람은 하나의 창작물에 그 정도로 모욕적인 평가를 내리는 데 얼마만큼의 자신감이 필요한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게임을 다시 반복적으로 플레이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 속에서 조금이라도 내 의견이 바뀌길 어느 정도는 바랐다.

그러나 6회차 플레이를 통해서도 내 의견은 바뀌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이제는 <Sekiro: Shadows Die Twice(이하 세키로)>가 전방위로 실패했고, 따라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작품이라고 선언하는 데에 일말의 주저가 없다. 마치 게임의 개발에 있어 아무런 명확한 목표가 없었다는 듯, 그리고 작품의 모든 요소가 마치 각양각색의 가치관과 비전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한 듯 통일성이 전혀 없다.

나는 이미 <레드 데드 리뎀션 2(Red Dead Redemption 2)>의 비평을 통해 통일성을 잃은 모순된 디자인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그 문제점이란 자유롭고 시스템적(systemic)인 오픈월드와, 게임이라 보기 어려운 메인 미션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RDR2조차도 모든 방면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개발사가 내세운 목표는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게임의 가치와 무관하더라도 준수한 내러티브와 멋있는 캐릭터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디자인조차 그저 다양한 소비 계층을 끌어들이기 쉽게 여러 놀거리를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게임이 아닌 서비스의 관점에서는 성공적인 디자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컨슈머 입장에서도 6만원짜리 타이틀 하나로 드라마도 보고 사냥도 했으며 도박도 즐겼으니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키로는 정체성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차라리 RDR2처럼 다양한 소비 계층을 끌어 모으는 데 주목했다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키로는 분명 프롬 소프트웨어의 팬들을 겨냥한 작품이다. 그래픽은 <다크 소울즈 3>(이하 DaS3)에서 거의 변화가 없고, 다양한 놀거리도, 멋들어지는 컷신과 스토리도 없다. 게임을 그저 여가 시간의 유흥 거리 정도로 여기는 소비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것들인데도 세키로는 그런 것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따라서 세키로는 게임 플레이로 승부를 보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그 게임 플레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일말의 통일성도 없이 중구난방이다. 그래서 나는 이 게임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지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이 게임이 가진 콘텐츠는 일목요연하게 정리 가능하다. 여러 레벨이 유기적으로 엮인 심리스 세계를 모험하며 각 난관들을 깨나가는 DaS식 게임 진행부터 시작하여 전투와 스텔스, 수집 요소와 심지어 성장 요소까지 상당히 다양한 콘텐츠를 아우르고 있다. 문제는 이것들을 엮어주는 어떤 공통된 주제가 없어 서로 끊임없이 모순되고 충돌한다.

심지어 개중에는 완벽히 무의미한 것까지 있다. 가령 세키로의 성장 시스템인 스킬 트리는 DaS의 스탯이나 장비 시스템과 달리 다양한 성장 방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스킬 설명만으로도 자명하다. 인살에 성공하면 체력을 회복한다든가, 간파 직후의 공격에 버프가 붙는다든가...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플레이어가 엔딩을 향해 치닫을수록 늘어나는 적의 피통이나 공격력의 성장치와 플레이어의 성장치를 유사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들일 뿐, 다양한 문제 해결 방식을 전혀 제공하지 못 한다. 세키로가 ‘한 가지 플레이 방식을 강요한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스킬 트리는 간파같이 반드시 찍어야만 하는 기술 한두 가지를 제외하면 완전히 무시 가능하다. 즐비한 수집 요소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찾아 강화할 수 있는 의수 도구 자체가 몇몇 보스의 특정 약점을 공략할 때나, 스킬 트리처럼 단순히 전투를 더 쉽게 만드는 데에만 쓰일 뿐이다. 덧붙여 게임 플레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러티브 역시 무의미하다. 어차피 이 게임의 서사는 게임과 완전히 떼놓고 봐도 별 가치가 없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들은 무의미할지 모르나, 치명적인 단점까지는 아니다.

사실상 없어도 되는 것들을 다 쳐내면 남는 것은 레벨과 전투, 그리고 스텔스뿐이다. 세키로의 정체성 역시 이 세 가지에서 그 흔적 정도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개의 가치가 곧 세키로의 가치이며, 이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는 것이 세키로가 도대체 어떻게 모든 방면에서 실패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1. 게임 플레이의 두 요소


모든 게임 플레이는 난관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이다. 플레이어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주어진 난관을 해결한다. 구조적 통일성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게임 플레이의 이런 특성 때문이다. 시스템이나 난관이나 독자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어떻게 서로가 맞물리고 서로를 보완하는지를 파악해야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DaS의 ‘병자의 마을’은 낙사 시스템이 없다면 추락사의 난관으로 동작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z축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센의 고성’에 배치된 함정과 좁은 길은 플레이어의 전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레벨은 낙사가 존재하고 z축을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DaS 특유의 시스템에 맞게 디자인되었으며, 따라서 DaS나 비슷한 시스템을 가진 게임 안에서만 유의미한 난관으로 동작한다.




세키로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난관과 시스템의 상호작용이 완전히 엇나가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굳이 병자의 마을과 센의 고성을 예시로 든 건, 세키로의 레벨 디자인이 저 두 레벨들을 그대로 가져와 거기서 낙사를 없애고, z축을 아무런 리스크 없이 오갈 수 있는 갈고리를 추가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z축의 이동이 제한적인 시스템 하에서만 의미 있던 레벨들이 z축의 이동이 자유로운 시스템과 결합했기 때문에 세키로의 레벨들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좀더 풀어서 쓰자면, 소울 시리즈 초기작들에선 하나의 레벨을 탐험할 때 지형지물과 상호작용하고 낙사 대미지와 함정에 유의하며 나아가야 한다. 제대로 된 점프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데몬즈 소울즈(Demon’s Souls, 이하 DeS)>를 제외하면 사다리나 계단으로 연결되지 않은 더 높은 언덕을 단번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DeS마저 매우 낮은 지형에 한해서만 가능했다) 더 낮은 지형으로 내려가는 것 역시 낙사 데미지에 유의하며 계산적으로 행해야 한다. 병자의 마을과 DaS2의 DLC 맵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항상 지형지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전체적으로 관찰하면서 전략을 세워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키로는 우선 높이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갈고리가 있다. 갈고리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갈고리를 걸 수 있는 지점들의 선정에 아무런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일관성이 없으니 플레이어로서는 갈고리를 걸 수 있는 마커가 뜨기 전까지는 어디에 갈고리를 걸 수 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완벽히 똑같이 생긴 기와도 어느 곳에는 걸 수 있고 어느 곳에는 걸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부처의 손에다가도 갈고리 지점을 만드는 등 외양에 아무런 일관성이 없다. 그래서 세키로의 길 찾기는 플레이어가 어떠한 계획을 세워 지형지물과 상호작용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고리 마커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숨은 그림 찾기나 다름없다. 그것도 유아용 수준의 숨은 그림 찾기 말이다.

더 심각하게도 세키로는 레벨들이 갈고리라는 시스템에 맞게 짜여지지 않아 갈고리 하나만으로도 모조리 존재 가치를 잃는다. 아무렇게나 갈고리를 연타하는 것만으로도 말 그대로 모든 레벨을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다. 갈고리 같은 이동기엔 그에 걸맞은 레벨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 당연한데도 프롬 소프트웨어는 아무런 대책을 내세우지 못 했다. 가령 <프레이(Prey)>나 <디스아너드(Dishonored)>는 세키로의 갈고리보다도 더 뛰어난 이동기가 있지만, 레벨들이 수직적이고 복층 구조를 이루고 있고 다양한 이동 경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단순히 글루건이나 블링크를 쓸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난관의 해결로 이어지진 않는다. 갈고리 마커가 그 자체만으로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하는 세키로와는 크게 다르다. 결정적으로, 프레이의 글루건과 디스아너드의 블링크는 매우 일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그러니 플레이어는 그 기준을 파악한 뒤엔 멀리서 맵을 관찰하며 다양한 이동 경로를 발견하고 스스로 선택해 공정하게 게임을 깨나갈 수 있다.

세키로는 레벨 자체도 수직적이지 않고 지형들의 높낮이만 다를 뿐 수평적이다. DaS는 z축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기술이 없어 지형들 간의 높낮이 차이만으로도 수직적인 레벨을 구성하는 게 가능했으나, 세키로는 낙사가 없다. 지형들 간의 높낮이 차이만으로는 수직적인 레벨을 만들 수 없다. 거기다 낙사가 없는데 밑의 다른 지역으로 떨어지면 마치 절벽 아래로라도 떨어진 양 화면이 새까매지면서 데미지만 받고 다시 원래 위치에서 깨어난다. 적절한 타이밍에 갈고리를 쓰면 밑의 지역으로 갈 수 있긴 하나, 그걸 떠나서 규칙 자체에 아무런 일관성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세키로의 레벨들은 높이에 따라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사실상 z축이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낙사 처리를 해라.

요컨대 세키로의 레벨 디자인은 시스템과 난관이 전혀 맞물리지 못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내 z축을 이용한다는 환상만 받은 채 막상 레벨을 깰 때는 그저 마커를 찾아 L2를 연타할 뿐이다. 더불어 필드에서 마주하는 모든 적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 한다. 갈고리를 쓰는 걸 견제하는 적은 아무도 없으며, 플레이어의 진행을 방해하는 건 미니 보스와 보스뿐이다. 월드 디자인은 DaS 2나 3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비선형적이다. 그런데 각 레벨의 구성이 수준미달인데 월드 디자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레벨 디자인이 망가져 있으니 세키로의 또 다른 핵심적 요소인 스텔스 역시 제대로 굴러가지 못 한다. 레벨 디자인과 별개로 보아도 이 게임의 스텔스엔 문제점이 많다. 적에게 발견되어도 아무런 패널티가 없고, 적이 시체를 보고도 반응하지 않고, 적들의 인식 범위가 주정뱅이만도 못 하며, 다양한 암살 루트나 암살 기술 따위도 없다. 단순히 전투를 어려워하는 플레이어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초보자용 진행 루트에 불과하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필드의 적들은 게임 진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스텔스 또한 의미가 없다. 갈고리를 통해 전부 아무런 리스크 없이 지나칠 수 있는데, 왜 굳이 수준 낮은 암살을 시도하겠는가?




종합해보면 세키로의 필드는 존재 가치가 아예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필드가 의미가 없는데 왜 아직도 플레이어는 죽은 뒤에는 마지막으로 휴식한 불상에서 다시 되살아나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초기 소울 시리즈는 게임을 진행하다가 사망하면 화톳불에서 되살아나 다시 먼젓번에 죽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과정 또한 하나의 난관이었다. DeS는 비좁은 지형이나 몹 배치, 그리고 용 같은 기믹들을 통해, DaS 1은 빠른 이동의 부재와 유기적인 월드 디자인을 통해, 그리고 DaS 2는 몹 배치를 통해 뛰어난 난관들을 제시한다. 거기다 2편은 안개벽 진입 딜레이도 존재하며 시리즈 통틀어 가장 뛰어난 다대일 전투를 보여준다. 그러니 이 게임들에선 필드가 의미 있다.

세키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여전히 죽으면 불상에서 되살아나 L2만 연타하는 그 지루한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마치 DaS를 개발할 때 자신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화톳불에서 되살아나도록 설계했는지도 잊은 채 그저 DaS를 베끼는 데에만 급급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만약 이 게임이 필드를 아예 빼버리고 미니 보스전과 보스전만을 남겨두었다면, 좀 더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려면 일단 전투에 가치가 있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사실 세키로의 주요 게임 플레이는 레벨의 완주나 스텔스가 아니라 적과의 정면 대결인 것이 자명하긴 하다. 그러므로 전투 이외의 것들로 세키로를 비판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세키로의 전투가 이보다 더 망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망진창이란 점이다.

2. 방어의 게임


세키로는 방어의 게임이다. 방어적인 게임은 아니다. 기본적인 전투는 공방이 순차적으로 오가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형식과는 별개로, 세키로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방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형 적들을 상대론 방어의 수단들을 이용해 체간을 깎는 것이 전투에서 승리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어의 수단이 곧 공격이나 다름없다.

또 세키로의 공격은 순수한 공격으로써 기능하지 않는다. 인간형 적은 일반 상태(Neutral)에선 항상 가드를 올리고 플레이어의 공격을 쳐낸다. 일반적으론 공격을 통해 적의 체력을 깎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체간이 오르는 정도 역시 적다. 그래서 적이 일반 상태일 때 적을 공격하는 행위는 적의 체간이나 체력을 깎는 ‘순수한 공격’이 아니라, 적의 체간이 회복되지 않도록 저지하거나, 적의 패턴을 유도해내는 용도로 쓰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무엇보다도, 세키로의 공격은 그저 RB를 연타하는 것뿐이며, 세키로의 방어 수단들과 달리 정확한 타이밍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적은 거의 언제나 플레이어가 공격해오면 자신의 패턴을 끊으면서까지 방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플레이어로썬 일반 공격을 계속 연타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스태미나 같이 그것을 저지하는 시스템도 없다. 그러므로 세키로는 시스템적으로 게임 플레이에 있어 공격이 그다지 의미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거나, 적어도 설계하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게임의 공격이란 아무런 제약도, 생각도 없이 RB만을 연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적의 체간과 체력에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순수한 공격은 적의 패턴을 패리한 직후에 약 공격이나 유파 기술을 통해 반격하는 것뿐이다. 점프 + 킥 + 유파 기술 역시 이에 해당한다. 즉 순수한 공격의 행위마저 먼저 방어가 선행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세키로는 방어의 게임이다. 물론 공격으로 적의 패턴을 유도하는 것도, 적의 체간이 회복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 그러나 세키로의 전투에서 플레이어의 목적은 적의 체간을 쌓는 것이다. 제 아무리 적의 패턴을 유도해내더라도 패리에 실패하면 체간을 쌓지 못 하며, 그러면 체간이 회복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행위도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세키로의 핵심은 적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는 데 있으며, 그 외 다른 요소들은 이를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공격 수단의 가짓수가 <블러드본>(이하 BB)보다도 적은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BB에선 적과의 거리에 따라 변형 공격이나 스탭 공격, 스탭 변형 공격 등의 여러 공격 옵션들을 선택하여 쓰게 된다. 거기다 보스를 상대론 누적 경직치까지 계산해야 하는 등 공격이 매우 중요하다.




<인왕(Nioh)>는 그보다도 더 다양한 옵션을 제공한다. 각 무기마다 평타 공격이 사거리와 공격 속도, 그리고 피해량 별로 여섯 가지로 나뉘어 있다. 여기다 기술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또 방어 수단 역시 무적 시간의 길이와 회피 속도 별로 네 가지가 있다. 역시 z축을 이용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기술까지 포함하면 수가 더 늘어난다. 애초에 패리를 빼면 공격과 방어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둘 다 중요하고, 따라서 공방의 수단 자체가 매우 다양한 것이다. 그래서 인왕에선 적의 패턴의 딜레이와 변칙성을 모두 파악하고 적절한 방어 수단을 골라 회피한 후 상황에 맞는 공격 수단을 통해 적을 타격해야 한다.

반면 세키로에서 자주 쓰이는 공격 옵션은 약 공격 단 하나뿐이다. 그러니 거리나 위치 별로 다른 공격 수단을 고를 필요는 전혀 없다. 차지 공격이나 유파 기술, 의수 도구는 모두 특정 상황에서 특정 용도로만 한정적으로 쓰이기에 전투를 보조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세키로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세키로가 방어의 게임이기에 공격이 단순화한 것뿐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공격 수단이 부족하다고 세키로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택과 집중으로 보는 게 더 옳다.


세키로의 전투에 대한 평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게임은 방어가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공격이 단순해졌다. 방어의 수단이 곧 적의 체간을 깎는 주요 공격 수단으로 쓰이므로 방어에 어떻게 차별화를 두냐에 따라 세키로의 가치가 결정된다.

세키로의 방어엔 간파, 스탭, 튕겨내기, 그리고 점프가 있다. 각 방어 옵션은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적의 모든 패턴에 일대일로 대응하며, 그 이외의 방식으로 대처하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찌르기는 무조건 간파로, 하단 베기는 점프로, 그리고 일반 공격은 튕겨내기로 대응해야만 가장 효과적이다.

간혹 방어가 곧 공격인 것이 마치 새로운 것인 양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키로의 방어 수단들은 스탭을 빼면 모두 시스템적으로 다른 게임들의 패리와 완벽히 똑같기 때문이다. 게임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나 기본적으로 패리는 적의 공격을 무효화하며 적의 체력에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체력을 회복하는 등 어떠한 이득을 취하는 기술이다. 세키로의 간파와 튕겨내기, 점프 역시 똑같지 않은가? 그저 과정을 생략하고 리스크와 리워드를 줄였을 뿐이다.

즉 패리 자체에는 조금도 새로울 게 없다. 이미 기존의 게임들에 존재하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온 것에 가깝다. 하다못해 DaS나 BB에도 있는 게 패리다.


체간 역시 모방에 가깝다. 인왕의 Ki Break를 연상케 하는 이 시스템은 그저 재생 속도만 빠를 뿐 다른 게임들의 체력과 완벽히 똑같이 기능한다. 체력과 체간이 시스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왕에서 적들의 기력은 플레이어가 적을 공략할 때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원이다. 막고 있는 적한테 쓰면 더 높은 기력 피해를 주는 기술과 체력 피해는 적지만 기력 피해는 높은 기술을 적절하게 섞어서 써주며 적을 기력 소진 상태로 만들어 높은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상황에 따라 체력 피해와 기력 피해를 번갈아 가며 가하면서 전략적으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체력과 기력이 시스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적한테서 기력을 없애면 인왕의 전투 시스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세키로의 체간은 아무런 전략적 계산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체간을 깎아 죽이는 적은 체간이 체력의 역할을 하고, 체력을 깎아 죽이는 적은 말 그대로 체력이 체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왕 역시 요괴형과 인간형을 상대할 때 다른 대처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가지 대처법이 무조건 다른 대처법들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다. 일단 기본적으로 둘 모두 여전히 기력을 깎아 공략할 수 있다. 거기다 요괴형은 약점을 때려 공략할 수도 있고 인간형은 다리 걸기나 자리 이동 같은 제어기를 통해 공략할 수도 있다. 즉 기력을 깎는다는 기본적인 틀은 똑같이 유지하며 거기에 적의 종류에 따라 또 다른 대처법이 추가되는 개념이다.

반면 세키로는 적의 종류에 따라 한 가지 대처법만이 강요되며 다른 대처법이 소거되는 형식이다. 괴수형 보스는 사자 원숭이 2 페이즈를 빼면 체력을, 모든 인간형 보스는 체간을 깎아 죽이는 게 가장 빠르고 시스템적으로 강요되어 있다. 초반부에 쵸를 상대할 때 체간 회복 속도가 빠른 보스는 체력을 먼저 깎아 죽이는 게 낫다는 도움말이 등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몇 회차이든 간 쵸나 올빼미, 파계승 같이 체간 회복 속도가 높은 보스들도 체간을 깎아 죽이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다. 그러니 괴수형을 상대론 튕겨내기가 의미가 없어지고(여전히 DaS의 가드처럼 사용할 수는 있다) 인간형을 상대론 회피가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세키로 역시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 각각의 시스템은 모조리 모방에 불과하나, 그 시스템들의 구성비가 특이하다. 가령 소울본에는 패리 말고도 회피나 막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전투 자체가 패리 단 하나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반면 세키로는 방어 수단 자체가 패리로만 구성되어 있다. 스탭은 패리가 아니긴 하나 세키로에서 스탭을 쓸 일은 거의 없어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이다.

즉 세키로의 전투가 가진 문제점이란 바로 패리가 근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점과 일치한다. 일단 전투 자체가 수동적인 성격이 강하다. 세키로에서 능동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상술했듯 결국 세키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의 패턴을 기다렸다가 정확하게 패리해내는 것이다. 그저 적의 패턴에 알맞은 패리 버튼을 누르는 게 다니 전략성이 완전히 배제되며, 반사신경만이 전투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로 부상한다.

또 세키로의 패리는 리스크에 비해 리워드가 지나치게 크다. 이는 타 게임들의 패리 역시 똑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일단 타이밍에 익숙해지면 실패하기가 더 어려우므로,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물론 세키로의 패리가 소울본에 비하면 리워드가 크게 준 것은 사실이다. 그냥 적의 체간만 좀 오르는 정도이니까. 문제는 그와 함께 리스크도 지나치게 줄어버렸다. 소울본의 패리는 일단 실패하면 적에게 무조건 맞는다는 리스크와 처벌이 언제나 존재한다. 패리와 가드가 분리되어 있기에, 둘을 동시에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세키로는 패리와 가드 버튼이 통일됨에 따라 패리의 실패가 피격이 아닌 가드로 이어진다. 거기다 가드 자체의 딜레이나 모션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2회차까지는 계속 가드만 연타해도 게임의 엔딩을 손쉽게 볼 수 있으며, 자세가 무너졌을 때의 처벌도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적들이 플레이어의 자세가 무너진 것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스크에 비해 리워드가 지나치게 컸던 문제점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

올빼미가 유일한 예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바로 패리의 조건에서 기인한다. 회피는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기술이지만, 패리는 적의 공격에 맞아야만 쓸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위치 선정과 거리 조절이 거의 의미가 없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보스의 패턴이 알아서 플레이어를 빗겨나갈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물론 적이 플레이어의 이동 경로를 예측한 경우라면 공격이 알아서 빗겨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예들을 빼면 기본적으로 적들은 플레이어가 피격당할 상황일 때에만 공격한다. 즉 만약 적의 공격에 맞는 것이 목표라면 플레이어로썬 위치에 변화를 줄 이유가 없다.




이런 점에서 소울본과 세키로의 전투는 근본부터 다르다. DaS와 BB의 회피엔 방향이 있다. 회피의 제1 목적이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라면, 회피의 결과는 플레이어의 위상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즉 어느 방향으로 회피하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위치라는 조건 또한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소울본의 전투는 곧 위치 선정과 거리 조절의 싸움이다. 특히 BB는 회피의 무적 시간이 짧고 프레임 당 이동 거리가 멀어 위치 선정과 거리 조절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전투 시스템의 정점에 선 보스가 바로 루드비히다. 1 페이즈의 루드비히는 일반적인 야수 보스와 달리 자신의 등 뒤와 몸 아래를 아우르는 강력하고 딜레이가 짧은 패턴이 많다. 그래서 적절하게 거리를 벌리며 패턴을 보고 안으로 파고든 후 공격을 넣고 다시 밖으로 빠지는 플레이가 요구된다. 설령 루드비히의 뒤쪽으로 가게 되더라도 빠르게 그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2 페이즈에선 1 페이즈와 달리 루드비히로부터 거리를 벌려선 안 되며, 정면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연타 횡공격 패턴이 많아 패턴이 시작된 방향을 항상 확인하며 스탭을 밟는 방향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플레이어의 목적이 적의 공격을 피하는 데 있기에 의미 있다. 회피가 목적이니 회피의 방향이 중요하며, 공방이 분리되어 있으니 회피 직후에 적을 공격하는 것까지 고려해서 거리를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각 행동에 어떠한 방향성을 부여하고 얼마만큼의 스태미나를 소모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세키로는 그렇지 않다. 세키로에서 플레이어의 목적은 적의 공격에 맞는 데 있다. 그러므로 왼쪽 스틱에서 손을 뗀 후 적의 패턴을 유도하여 정확한 타이밍에 패리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게 무슨 패리이든 간 상관없다. 누르는 버튼이 다른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DaS의 구르기나 BB의 회피는 다 똑같은 버튼 하나로 발동할지언정 방향성이 존재하여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니 ‘다 같은 구르기’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반면 세키로의 점프, 튕겨내기, 그리고 간파는 방향성은 없고 타이밍만 존재하기에 한 가지 상황에서 한 가지 용법으로만 쓰인다. 누르는 타이밍 별로 다른 활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패리를 누르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플레이어는 단순히 적에게 꼭 달라붙어 리듬 게임하듯 정확한 타이밍에 버튼만 누르면 된다. 적에게 달라붙기만 하면 되니 거리 조절은 의미가 없다. 스태미나도 없으니 거리 조절에 어려움도 없다.

잡기를 피하기 위해선 거리 조절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대단한 착각이다. 세키로의 잡기는 모션을 보고 대처해도 쉽게 피할 수 있다. 잡기를 피하려면 전투 내내 적과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가령 DaS 2의 썩은 자가 2 페이즈부터 쓰는 광역기나, 루드비히 1 페이즈의 뒷발차기는 선 딜레이가 짧다. 그러므로 항상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피할 수가 있다. 반면 세키로의 거의 모든 잡기는 그저 모션을 보고 순간적으로 반응해도 언제나 피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사자 원숭이의 2 페이즈를 상대론 위치 선정과 거리 조절이 의미가 있다. 먼저 사자 원숭이의 공격을 튕겨내려면 사자 원숭이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적절한 위치에 머물러야 하며, 비명 지르기 패턴의 선 딜레이가 짧고 공격 범위도 넓어 거리 조절도 어느 정도 중요하다. 거기다 직관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약점도 있다. 물론 그냥 체력 깎아 죽여도 된다. 그러나 거리 조절과 위치 선정 잘하고 약점 공략하며 싸우면 체력을 깎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체간을 깎을 수 있다. 즉 숙련된 플레이어의 숙련된 플레이를 제대로 보상한다. 다른 보스들은 그렇지 않다.



요컨대 세키로의 방어는 소울본의 방어보다 깊이가 있거나, 더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소울본의 방어보다 단순화하고 퇴보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회피가 사라지고 오롯이 패리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또 점프 자체가 단순히 적의 하단 베기를 패리하는 용도로만 쓰이니 z축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세키로는 방어의 게임임에도 방어 자체가 허술하고 완성도가 낮다. 액션 게임이 방어만을 다루어선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방어만을 다룰 것이라면 좀 더 제대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시 방어 위주로 설계된 퓨리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퓨리 역시 일단 적의 공격을 패리해내거나 옆으로 회피해야만 의미 있는 공격이 가능하다. 총 공격은 그냥 조이스틱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든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기 보단 그냥 전투의 길이를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퓨리 역시 그 제한된 시간 안에서 적의 공격을 전부 패리하고 회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퓨리의 방어도 깊이는 얕다. 그러나 깊이가 얕은 만큼 탄막과 패리 등 여러 종류의 난관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방어의 수단도 대쉬나 차지 대쉬, 패리 등으로 훨씬 다양하며, 위치에 따라 패턴에 대한 대응법도 달라 거리 조절과 위치 선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세키로는 패리만 요구한다. 깊이도 없고 다양하지도 않다. 거기다 괴수형을 상대론 패리도 의미가 없어진다. 좀 더 다양한 종류의 방어 수단과 난관을 소개해야만 했다.

3. 적 디자인

3-1. 변수의 배제


종합적으로 세키로의 전투 시스템은 혁신적이지 않고, 깊이도 얕으며 다양성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여전히 방어의 게임이라는 통일성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패한 디자인임에도 적어도 허술한 리듬 게임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난관은 어떨까? 이미 말했듯이 모든 게임 플레이는 시스템과 난관의 상호작용이다. DaS식 게임 진행의 난관이 레벨 디자인이었다면, 전투 시스템의 난관은 적들이다. 소울본의 전투 시스템 역시 세키로보다는 아니지만 나름 허술하고 단순 간단하다. 일반 적들은 연타 공격이나 뒤잡에 매우 약하다. 그래서 이 게임들의 중요한 적들은 모두 슈퍼 아머 판정이며, 뒤잡에도 면역이다. 적 디자인이 시스템의 단점을 상쇄한 것이다.

즉 세키로 역시 전투 시스템에 문제가 많더라도, 그 문제점들을 적 디자인으로 보완하기만 한다면 전투 자체의 가치는 높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임이 그렇듯, 시스템과 난관은 독자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 디자인이야말로 세키로의 전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일단 패턴의 가짓수부터가 적어도 너무 적다. 패턴 세 개짜리 적들이 미니 보스나 보스로 버젓이 등장하며 가드 불능기도 뱀의 눈 미니 보스들을 빼면 게임 내내 세 종류밖에 안 나온다. 거기다 타이밍마저 모든 보스가 유사하다. 반사신경과 암기만을 요구하는 게임에서 패턴의 가짓수마저 적은 건 이해하기 힘들다.

또 적의 패턴들엔 변수가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BB나 인왕의 적들처럼 플레이어의 위치에 따라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 연계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저 플레이어의 패리 성공 여부에 따라 후속타가 하나 추가되는 정도며 그마저도 겐이치로나 검성, 사자 원숭이와 파계승 정도만이 해당할 뿐이다.

똑같은 패턴을 계속 돌려쓰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다 적들의 가짓수 자체가 너무 적다. 제대로 디자인된 적들을 재탕하는 건 오히려 좋은 것이다. 실제로 제대로 디자인된 몇 안 되는 적 중 하나인 사무라이 대장이 계속 등장하는 건 매우 반갑다. 좋은 적이나 보스를 만들어놓고 한 번만 등장시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몇 번 재탕하고, 거기다 다른 적과 조합해서 다시 등장시켜야 마땅하며, 사무라이 대장 역시 나중엔 여러 잡몹과 함께 등장하여 다대일을 강제한다. 매우 좋은 게임 디자인의 예시이다. 나머지는 그렇지 못 할뿐이다.

만약 각 패턴과 공격을 모션을 통해서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한 뒤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 연계되는 등 변칙성을 추가하고 패턴의 수도 훨씬 늘렸다면 꽤 좋은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적의 모션을 면밀히 파악하고 무기의 이동을 통해 패리 타이밍을 알아내야 할 테니 말이다. 반사신경과 암기만을 요구하는 게임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이미 검성이나 파계승은 어느 정도는 저런 특성을 띄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결국 세키로의 방어는 단순 반복에 가깝다. 변수가 배제된 전투는 그저 암기에 불과하며, 그 암기조차 패턴의 가짓수가 두세 개뿐이라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 게임 내내 적의 모션에 알맞은 패리 버튼과 타이밍을 외워서 연타할 뿐이다.

3-2. 시스템과 난관의 부조화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세키로의 적들이 소울본보다도 방어적이라는 점이다. 적의 패턴을 패리로 쳐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임에서 적들이 방어적이라는 것은 게임이 근본적으로 망가져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시스템과 난관이 아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보스들조차 지나치게 방어적이라 자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다. 최종 보스인 검성조차 그렇다. 그나마 체간이 반 이상 쌓이면 공격적으로 패턴을 몰아치긴 한다.

그래서 적들을 상대할 땐 무조건 약 공격 연타로 패턴을 유도해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적의 체간을 채우는 것도, 채운 체간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전투가 늘어진다. (어려워지는 게 아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시스템과 난관이 심각한 부조화를 일으킨다. 약 공격 연타로 패턴을 유도해내도록 요구하는 게임의 적들이 정작 약 공격 연타에 제대로 대처를 못한다. 전투 상황에서 적의 상태는 총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비전투 상태/일반 상태(Neutral)와 플레이어의 공격을 일반 가드로 막은 상태, 그리고 플레이어의 공격을 완벽하게 패리한 상태로 말이다. 세 번째 상태에서 구사되는 패턴들은 보통 슈퍼 아머가 붙어 있거나 딜레이가 짧아 약 공격으로 패턴을 차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일단 적에게 패리 당하면 무조건 공격을 멈추고 가드를 눌러야 한다.

문제는 일반 상태와 가드 상태다. 적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상태에서 구사하는 패턴들은 슈퍼 아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령 겐이치로의 활 쏘기 패턴이라든가, 올빼미의 하단 베기 패턴 같이 말이다. 그래서 약 공격 연타에 무조건 차단당한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가 계속 약 공격만 연타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상태에서 나오는 패턴들은 죄다 차단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겐이치로의 패턴은 크게 일곱 가지다. 짧은 평타 공격을 하거나, 연타 공격을 하거나, 점프 공격을 하거나, 활을 쏘거나, 옆으로 빠지며 활을 쏘거나, 옆으로 달려가며 하단 베기를 쓰거나, 찌르기를 쓰는 것이다. 여기서 짧은 평타 공격과 연타 공격은 겐이치로에게 패리 당한 상황이면 공격으로 패턴을 끊을 수 없다. 점프 공격과 찌르기 또한 슈퍼 아머가 붙어 있다.

문제는 나머지 세 패턴이다. 활을 쏘는 패턴들은 공격에 쉽게 경직당하며 옆으로 달려가는 패턴은 플레이어의 공격이 닿지도 않았는데 겐이치로가 알아서 자기 패턴을 끊어먹는다. 그러니 플레이어가 계속 약 공격만 연타하고 있다면 겐이치로가 활을 쏘려고 하거나 하단 베기를 쓰려고 할 때마다 패턴을 차단할 수 있다. 그래서 약 공격만 하는 것만으로도 보스의 패턴을 사실상 2~3개로 제한할 수 있을뿐더러 체간과 체력에도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다.




겐이치로뿐만이 아닌 세키로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간형 적은 이렇다. 빨간 갑주 닌자와 태도족, 도복 입은 무사, 그리고 강인도가 높은 몇몇 극소수의 적들만 예외일 뿐 마지막 맵인 기원에 등장하는 적들조차 그렇다. 보통 두 번째로 상대할 보스인 쵸도 2 페이즈 패턴을 하나도 못 쓰고 맞기만 하다 죽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게임의 보스가 2 페이즈 패턴도 못 쓰고 죽는다는 것보다도 심각한 문제가 있을까? 최종 보스인 검성 아시나 잇신조차 한 10초 동안 짧은 평타 공격 패턴만 쓸 뿐 제대로 된 패턴을 하나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보스가 2 페이즈 패턴을 하나도 못 쓰는 건 처음 본다.

그러니 모든 인간형 적은 아시나 잇신을 빼면 패턴이 사실상 2개에서 3개 정도밖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안 그래도 패리 일변도라 단조로운 방어가 훨씬 더 단조로워진다. 패턴의 개수를 더 늘리고 패턴마다 쿨다운을 추가하여 한 번 구사된 패턴은 몇 초 동안은 다시 구사될 일 없도록 패턴 풀에서 제외했다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물을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약 공격을 연타하는 게 게임을 망가뜨리면, 약 공격을 연타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첫 번째로, 액션 게임에서 단순히 공격 버튼 좀 눌러주는 게 게임을 망가뜨린다면 그건 플레이어 잘못이 아니라 게임의 결점이다. 세키로가 무슨 RPG라서 약 공격을 한 번도 안 쓰고도 게임을 정상적으로 깰 수 있는 보편적인 빌드 같은 게 존재한다면 그 말이 맞다. 애초에 약 공격을 쓰는 빌드를 골라놓고 불평하는 내 잘못이다. 그런 게 세키로에 존재하는가?

두 번째, 물론 모든 게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스템을 악용할 여지가 있다. 내가 모든 게임을 다 해본 건 아니지만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발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므로 시스템을 악용하지 않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플레이가 존재한다면, 그런 것들로 게임의 가치를 깎아내려선 안 된다.

그런데 세키로는 적 디자인이 너무나도 허술하여 시스템의 악용과 보편적 게임 플레이의 경계가 흐릿하다. 가령 환영의 쵸는 쏙독새 베기만 연타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죽는다. 이건 버그성 플레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파 기술은 자원 소모가 없어 플레이어가 무작정 연타하고자 하면 할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허용되고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쏙독새 베기 플레이는 시스템의 악용이 아니며, 단순히 프롬 소프트웨어가 허술했던 부분이라고 본다.

그러나 만약 쏙독새 베기가 게임을 망가뜨리면 그저 다른 유파 기술로 갈아 끼우거나, 유파 기술을 안 쓰면 그만이다. 세키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파 기술을 전혀 쓰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짜여 있다. 오히려 약 공격 연타가 유파 기술보다 훨씬 좋아서 문제인 게임이다.

그렇다면 약 공격은 어떠한가? 약 공격을 연타하는 행위는 보편적 게임 플레이에서 벗어난 시스템의 악용이라고 볼 수 있는가? 단순히 적을 계속 공격하는 게? 절대 아니다. 이 역시 유파 기술과 마찬가지로 자원 소모가 아예 없다. 그렇다고 약 공격을 전혀 쓰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보편적인 플레이 방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이미 말했듯 세키로는 오히려 약 공격을 연타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선 약 공격 연타에 적들이 전혀 대처하지 못 하는 것이 게임의 치명적인 결점이며 게임의 가치를 깎아 먹는다는 비평이 가능하다.

물론 소울본의 일반 적들 역시 연타 공격에 쉽게 죽는다. 그러나 그 게임들엔 스태미나가 있었으며, 중요 적은 모두 슈퍼 아머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세키로엔 스태미나도 없고, 슈퍼 아머가 있는 적도 거의 없다. 즉 약 공격을 연타하는 것을 저지할 시스템이 없다.

또 스태미나가 없으니 적과 거리를 좁히는 게 너무나도 쉽다. 적들이 플레이어로부터 거리를 벌려도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어 적의 패턴을 차단하고 쉬운 패턴을 쓰도록 유도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스태미나가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스태미나가 없는 시스템에 알맞은 적 디자인이 필요했단 말이다. <닌자 가이덴 2(Ninja Gaiden 2)>와 비교해보면, NG2의 보스들은 세키로와 달리 플레이어의 약 공격 스팸에 아무것도 못 하거나, 패턴이 2개에서 3개 정도로만 제한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보스들 역시 플레이어의 공격을 회피하고 빠르게 반격하는 탓이다. 그래서 약 공격 연타만 해대면 보스의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할 틈이 없다.

사실 수라 루트의 아시나 잇신은 NG2의 인간형 적들처럼 회피기가 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평타만 연타하면 잇신의 반격에 반응을 못 한다. 다른 보스들 역시 이런 회피기가 하나씩은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약 공격 스팸을 방지해야 했다. 아예 패턴들을 죄다 슈퍼 아머로 만들었어도 적어도 지금의 세키로보단 나았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의 패턴을 차단하여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좋은 액션 게임에서 적의 패턴을 제대로 차단하려면 게임 시스템과 적들의 패턴, 그리고 AI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적이 어떠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하고, 어떤 타이밍에 어떤 커맨드를 입력해야 하는지 장기적인 계획을 짜야 한다. 또 적이 플레이어의 콤보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도 익혀야 한다. 즉 적의 패턴을 다 차단할 수 있더라도 애초에 그 과정이 복잡하고 높은 수준의 게임 이해도와 반사신경을 요구하기에 가치가 있다. 반면 세키로는 그저 RB만 눌러도 그게 가능하니까 문제이다.

다대일 전투 또한 적들이 너무나도 방어적이라는 게 발목을 잡는다. 여러 명이 플레이어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정작 공격해오는 적은 한 명뿐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사실상 다대일을 가장한 일대일 전투나 다름없다. 원거리 공격은 유도 성능이 지나치게 뛰어나 전략적으로 여러 적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그저 로버트의 폭죽 같은 의수 도구에 의존하게 된다. 의수 도구의 쓰임새도 그저 적을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 후 일방적으로 약 공격을 연타하는 것뿐이니 허수아비를 패는 듯하다.

4.


결국 세키로는 하나의 작품으로 묶일 당위성이 전혀 없는 여러 콘텐츠의 모음에 지나지 않다. 전부 따로 떼어내 조금의 보수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게임으로 발매를 했어도 지금의 세키로와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어느 방면에서는 세키로보다 뛰어난 게임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결국 세키로의 결함이란 여러 요소가 내적으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데에서 기인하기에,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레벨 디자인은 엉성한 갈고리 시스템으로 인해 존재 가치를 잃었으며, 전투 시스템은 그것과 일절 호환되지 못 하는 적 디자인으로 인해 완벽히 망가져버렸다.

그럼에도, 적어도 전투 시스템만큼은 제 나름의 통일성을 가지고 설계되었다. 문제도 많고 깊이도 얕지만 나는 전투 시스템에서 최소한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어의 게임이라는 주제에 맞게 공격을 단순화했으며, 비록 그 다양성은 심각하게 떨어지나 적어도 방어와 관련된 난관들을 일관되게 제시한다. 최소한 프롬 소프트웨어의 개발 의도 정도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강조하듯 게임은 시스템과 난관의 합이다. 제 아무리 시스템이 빛나더라도 독자적으론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그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여기엔 적어도 좋은 게임이 될 가능성이란 게 있었지만, 가능성에 그치고야 말았다. 게임이 되기 위한 충족요건만을 간신히 채운, 어떠한 구조적 일관성이나 통일성도 없는 ‘이것’에게서 도대체 무슨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저 가능성의 묫자리에 불과하다.


★☆
1.5/5

-Lee Y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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